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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Aug 03. 2019

처음으로 구두를 신은 날

오늘은 면접용 구두를 샀다



  “여기 면접 구두 있어요?” 면접용 구두를 맞추러 엄마와 백화점에 갔다. 물어보는 곳마다 점원들이 장식 없는 검정 구두를 내밀었다. 굽은 5센티, 색깔은 검은색, 장식이 붙지 않고 앞 코가 뾰족하지 않은 구두들은 어느 가게에 가도 똑같이 보였다.






  나는 원래 구두를 신지 않는다. 170센티에 가까운 키 덕분이기도 하고, 운동화를 신어도 오래 걷지 못하는 안짱다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입생 때 괜한 겉멋으로 샀던 3만 원짜리 로퍼는 세 번을 신고 신발장에 박혔다. 로퍼와 함께 샀던, 3센티 굽이 붙은 구두도 금방 신발장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구두를 신을 생각이 없었다. 면접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며 엄마가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랬을 거다.


  처음으로 들어간 가게에서는 면접 구두 세 개를 내밀었다. 5센티짜리 얇은 굽 하나, 통굽 하나, 7센티짜리 통굽 하나. 얇은 굽의 구두를 신자 발이 뻐근하게 아팠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보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어나서 중심을 잡느라 삐걱거리는 게 다였다. 내가 갓 태어난 아기 기린처럼 휘청거리자 점원이 급히 통굽 구두를 가져왔다. 갈아 신은 구두는 처음보단 편했지만, 여전히 계단 위에 비스듬히 서있는 듯 불안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도무지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뒤꿈치가 눌려서 아파요.” 투덜거리자 점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게 맞는 사이즈예요.” 좁은 앞 코에 발가락 다섯 개를 전부 집어넣으니 발이 구겨진 듯 아팠다. 거울을 보자 중심을 잡아보려고 곧게 선 내 모습이 보였다. 불현듯 백화점 판매직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단정해 보이기 위해 매일 아침 구두를 신고, 밤이 되도록 구두를 신은 채 서 있는 사람들. 무지외반증부터 하지정맥류, 족저근막염과 같은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매장에서 일률적으로 배급한 유니화 대신 정가로 40만 원이 넘는 송아지 가죽 구두 안에서도 발은 끔찍하게 화끈거렸다. 유리구두를 신으려고 발을 도려낸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된 기분이었다.


  구두를 신은 지 십 분이 지나자 벌써 발목이 욱신거렸다. “다들 이 정도는 신어.” 옆에서 엄마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엄마 말이 맞지만 위로는 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취업준비자는 74만 명에 이른다. 지금도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런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아연했다. 취업준비자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발을 구겨 넣고 뛰어가고 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말이다.


  영웅 서사는 고난과 극복으로 이루어진다. 어릴 적 내가 각오한 내 삶의 고난도 그런 식이었다. 대단한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 대립 같은 것. 그러나 보통 사람에게는 큰 비극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정작 우리를 괴롭히는 건 사소한 고통과 불편이다. 구두를 신어 부은 발이나 빨갛게 까진 발뒤꿈치처럼. 이렇게 발을 죄는 구두를 신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졸린 듯 휘청이던 구둣발들은 어떻게 아픔에 익숙해졌을까? 저리고 고단한 발목들은 어떻게 하루를 견뎌내고 있을까.






   네 곳의 브랜드를 둘러본 후 결국 처음 신었던 구두를 샀다. 여러 구두를 신어보며 나는 구두 앞 코의 모양에 따라 발가락이 어떻게 아픈지, 구두를 신으면 발목이 어떻게 저린지, 5센티와 7센티가 얼마나 다른지를 배웠다. 모두 똑같이 보였던 구두들은 신어보면 서로 달랐고, 그럼에도 똑같이 아팠다. 조금 싼 구두도 더 비싼 구두도 그랬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얼마를 받으며 일해도 우리 모두가 결국 노동자인 것처럼. “좋은 신발이니까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거야.” 구두 상자를 쥐여주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좋은 곳에 도착할 때까지 구두 안의 내 발이 멀쩡할지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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