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보내는 방법
이곳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가족이 없으면 제법 쓸쓸하다. 현지 친구들은 다들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니 말이다. 친구를 잘 만들어놓은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하필이면 꼴랑 둘인 친구가 전부 다 밴쿠버에 없는 상황이어서 제법 마음이 쓸쓸했었다. 딱히 크리스마스 같은 걸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로워지기는 하더라. 유학생이나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거나 하우스메이트들끼리 친하면 좀 낫겠지만 나는 저 셋 중에 아무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은 있다! 정말 다행히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이 없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함께 놀자는, 직장인인 필리피노 교회 친구의 파티에 초대받았다! 각자 2~3인분 정도의 음식을 준비해서 가야 했기에 나는 떡볶이를 만들어 갔다. 몇 번의 참여 결과, 이 곳의 파티는 주로 집주인이자 파티를 개최한 호스트가 기본적인 음식을 준비하고 게스트들이 각자 조금씩 음식이나 간식을 싸 가는 포틀럭 파티로 진행되는 듯하다.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의 멤버는 호스트인 친구와 그의 룸메이트, 내가 교회에 데려왔던 전 룸메와 그녀의 현 룸메이트이자 나의 전 룸메와 그 친구! 또 여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다른 교회 친구 둘과 그의 여자 친구. 어느 나라에서 왔는진 물어보진 않았지만, 여자 친구는 짐바브웨에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동양인 여섯과 흑인 셋의 다국적 파티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게 참 뻘쭘한 게,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인사하고 이야기를 하는 게 말이 쉽지... 그것도 그곳에 있는 전원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상황이니까 굉장히 긴장하게 되더라. 영어를 아주 잘하면 모르겠지만, 내 실력은 엉망진창이라 모두의 악센트를 고려하는 것이 꽤 쉽지는 않았고 거의 두 달만에 보는 전 룸메가 있었기에 초반에는 아무래도 한국인끼리의 근황 토크를 하게 되더라.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다 마찬가지인 상황! 적당히 서로 가져온 자국의 음식을 소개하기도 하고 익숙한 사람들끼리 이야기한 후에, 호스트의 주도로 다 같이 핸드폰을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시작하였다(참고: https://jackboxgames.com/party-pack-three/). 아무래도 교회를 기반으로 한 모임이라 그런지 유독 게임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이 친구는 프로그래머라 게임도 디지털 하게 하더라. 그래도 게임 덕분에 오히려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된다.
함께 한 게임 중 가장 재밌었던 게임은 Guesspionage라는 게임이었는데, 돌아가면서 한 명씩 제시된 문장에 대해 퍼센티지를 추측하고 나머지 사람이 업 앤 다운을 하여 맞추는 일종의 통계가 접목된 게임이었다. 5판의 게임 중 무려 4판을 내리 1위를 하니 친구들이 나를 견제한다고 같은 아이디에 숫자를 바꾸거나, 내가 하는 답을 따라 하거나 해서 덕분에 모두가 깔깔대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27일에는 또 다른 교회 친구 부부가 Young Adult 그룹을 초대한다고 연락을 했고, 각자 과자, 음료, 간식 등의 먹거리를 준비해 갔다. 총 13명이 모인 자리에서도 처음엔 음식을 나눠먹으며 대화를 하고 어느 순간부턴 보드게임이 시작되었다. 이 친구들이 정말 대단한 게, 각종 게임을 돌려가면서 밤 12시까지 쉬지 않고 계속하더라! 무려 3시간이 넘게!
나 홀로 영어가 서툰 한국인이라(다들 캐나다인, 이민 온 지 오래된 캐나다인, 현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회사원이다...) 다들 많이 배려를 해주는 편인데, 여전히 보드게임은 어렵다. 원래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현지 문화 혹은 대중문화를 모르면 참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를 가지고 하는 게임 또한 그렇다. 모르는 단어가 연달아서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나만 그 단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TABOO라는 보드게임을 하다 보니, 양 옆에 앉아있던 친구들도 나와 같은 스코어를 내는 것을 보고 '아, 언어의 문제도 있지만 설명을 어떻게든 잘하면 되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시그널(참고: http://boardlife.co.kr/bbs_detail.php?bbs_num=6259&tb=board_community&id=)이라는 카드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둘씩 팀을 이뤄서 자신이 가진 네 장의 카드를 규칙대로 맞추면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둘 만의 시그널을 보내고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시그널! 을 외치면 이기는 게임이다. 무슨 게임 운인지 이번에도 이 게임에서 1등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화젯거리를 만들어 대화를 좀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이브 때도, 이 날도 느낀 부분은 한국인의 마음에는 기본적으로 즐기는 것보단 경쟁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인 치고는 경쟁심이 바닥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냥 그 순간에 나와 함께해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되는데,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승자가 나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혀버리고 만다. 내 안의 한국인은 역시 버려지기 힘들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이 친구들과 어울리게 될 때마다 유독 느끼게 된다.
그렇게 밤 12시까지 격렬한 Game night을 보내고 삼삼오오 집이 가깝거나 친한 사람들끼리 차를 타고 집에 갔다. 집주인인 친구가 걱정이 되었는지 자신도 운전을 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라. 때로는 귀가까지 책임지는 캐나다인들이다!
그리고 남은 파티는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또 다른 교회 친구가 펜트하우스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자고 했다! 이번엔 참가비 10불! 이 친구의 집은 멋들어진 콘도인데, 펜트하우스라는 말이 콘도에 딸린 공간을 대여해서 파티를 하겠다는 건지 굉장히 궁금하다. 지금 집으로 이사하기 전엔 나도 콘도에 산 적이 있었는데 그 층에 딸린 공간에서 사람들이 파티를 하던 걸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건전하게 삼삼오오 모여 가족 혹은 친한 지인들과 집에서 파티를 하는 캐나다의 문화는 가게에 가서 주로 주야장천 술을 마시는 한국의 문화와 참 다르구나 싶다. 물론 내가 참여하는 파티가 교회 사람들과 하는 파티여서 더 그런 부분은 있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야외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된 나라다 보니 확실히 주류를 적게 소비하는 느낌이긴 하다. 술을 사려면 주류 전문 매장에 가서 2개의 ID를 보여야지만 구입이 가능하고 집 안에서만 마실 수 있는 나라와 아무 슈퍼나 편의점에 들어가서 바로 구매하여 야외 어디서든 마실 수 있는 나라가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때로는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 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아쉽기는 하지만, 집 앞 한국인이 운영하는 술집 앞에서 매주 금토일 밤마다 취한 한국인들이 새벽 2시까지 소리를 질러대 몇 달째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니 이런 문화도 아주 나쁘진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도 취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죽하면 근처에 한국어로 경고문이 쓰여있을 정도일까. 참으로 한국인 망신은 다 시키고 있다. 제발 여기서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그렇게 관성처럼 살지들 말았으면 좋겠다...
- 캐나다 밴쿠버에서, 2019년 12월 29일 목요일 오후 9시 50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