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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uren Feb 04. 2020

그래도 봄은 올 거야.


평범한 일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니,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직업을 가지고 매일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늘 나만의 시간이 절실하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주일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고,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나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설레었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아빠가 거실로 들여온 나무들 중에서 잎이 제일 예쁘게 빛나는 동백나무를 골라 알록달록한 선물 양말을 까치발로 서서 걸어두던 어린 시절 여섯 살 꼬마의 부푼 마음처럼, 내 마음도 하루하루 설레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다. 


'산타할아버지, 예쁜 인형이 갖고 싶어요!' 빙글빙글 손잡이를 돌려 깎은 연필로 꾸욱 꾸욱 눌러쓴 편지처럼, 

'산타할아버지, 얼른 수업 다 끝내고 즐거운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마음속에 풀칠 해 놓은 편지에 이미 나는 우표까지 부친 터였다. 







윈터 원더랜드를 선물해 주고 싶다.



누적된 피로로 많이 지쳐있었던 12월 15일,  2019년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돌아가자마자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무 미련 없이 바로 작업실 정리를 시작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오지도 않았는데, 11월 마지막 주에 하나하나  골라가며 가장 예쁜 오너먼트로 장식했던 트리를 분해하고 있는 거다. 내 키 보다 큰 트리에 따끔따끔 여기저기 찔려가며 꼼꼼히 감아올린 전구부터 다시 감아 내리고, 살짝 언 얼음 조각처럼 깨어질 듯 투명하게 반짝이는 유리 오너먼트들도 조심조심 하나씩 떼어내 신문지로 감싸 박스에 넣었다. 매해 엄선해서 틀어놓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여전히 작업실 여기저기에 흩어지고 있었지만, 아쉬움 없이 벽에 걸어둔 크리스마스 리스들도 하나, 둘 떼어내 박스에 담았다. 3주간 계속된 크리스마스 특강 수업시간에 만든 작품들 하나하나가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지만, 이내 단단한 박스에 담겨 수납장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의 조각들을 주섬주섬 담다 보니 어느새 창 밖엔 어둠이 내려앉았고, 원터 원더랜드는 봄을 기다리는 공간처럼 깔끔히 흔적을 감췄다.


올 겨울 상해는 참 이상했다. 한 겨울인데, 초봄 같이 따뜻하기 일쑤였다. 겨울 옷을 팔아야 하는 패션 회사들은 겨울 옷이 안 나가서 동동 거렸고, 이 이상한 날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 역시 당혹스러운 날이 많았다. 가뜩이나 눈은커녕, 가을에 제대로 된 단풍을 느껴보기 힘든 상해에서 올 해는 더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가 어려워 보였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들르는 스타벅스 출입문에 걸려있는 엉성한 크리스마스 리스 마저 올 겨울엔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 보이곤 했다. 


나는 매해 11월 말이면 윈터 원더랜드를 꿈꾼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향수는 저마다 가슴속에 한 움큼씩은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은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기 힘들지만, 그땐 그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통을 달고 있는 둥글고 커다란 군고구마 통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갓 구워낸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들이 곳곳에 보였다. 벌건 장작불이 타오르는 통의 길고 좁은 서랍에서 나란히 누워있는 껍데기가 검게 그을린 군고구마를 하나, 둘 세어 종이봉투에 담아주면, 하나만 더 달라며 실랑이를 하다가 귀엽게 눈을 흘기며 돌아서 이내 뜨끈한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거리에서는 쉽게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수 있었고, 하얀 눈이라도 내리면 뽀득뽀득 꽁꽁 언 발로 소리를 내며 '아이, 추워.' 호호 거려도 그냥 좋았던 그런 시절에 대한 향수. 나와 같은 종류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아련하지만 명확히 따뜻했던 추억을 다시 떠올려 주고 싶었고, 나와는 다른 세대로 색다른 추억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상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름답고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선물을 하고 싶어서 나는 매해 11월이면 올 해는 작업실을 어떤 윈터 원더랜드로 만들어 볼까 고민에 빠지곤 했는데, 올 겨울엔 때를 모르고 찾아온 주책맞은 날씨 덕에 작업실을 겨울나라를 만드는 일이 내게도 적잖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작은 모퉁이 공간 하나를 꾸밀 때도 정성을 다했던 그 시간들을 정작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에 모두 정리하고 있는 건, 올 한 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끝까지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미련도 없다는 일종의 자부심이기도 했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주고 떠난다는 홀가분함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빠른 다짐을 스스로 만끽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만의 시간을 꿈꾸다.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을 마주하다 보면, 언제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나온 하루나 한 주를 돌아볼 시간도 없고, 앞날을 내다볼 시간 역시 부족하다. 게다가 일과 살림을 병행해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남들보다 몹시 성실하게 살지만,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남들보다 몹시 의미 있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꾸 의미를 까먹고 살아가게 된다. 그나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게 힘든 때도 수업 준비를 마치고 잠시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면 그 시간과 그 공간과 그때의 모든 향기가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는 날도 많았다. 치열한 상해에서 7년간 무너지지 않고 플라워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내게 정말 대단하다고 격려해주시는 분도 많이 계신데, 사실 내가 지금껏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작정 행복해서 눈물이 흐르는, 마음에 감사의 강이 넘치는 그런 날들이 디딤돌처럼 버텨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해에서 이렇다 할 규모의 로드샵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일주일을 꼬박 일을 할 때가 많다.  제대로 쉴 시간을 갖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일이라고 욕심이라도 내면 그때는 내 잔에 넘치는 감사보다는 일이 일을 부르고, 그 일들이 나를 행복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아서 로드샵이나 규모를 키우는 일은 해가 갈수록 더욱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2019년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큰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밴쿠버로 떠나기로 했다. 가을에 일정을 정했고, 일찍부터 티켓팅도 해두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길 혹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제 며칠 남았지?'  세어가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 무딘 듯 무심하게 지나간 날들이 쌓여서 금세 떠날 날이 다가왔다. 밴쿠버에서 아들을 만나 앨에이로 가서 함께 여행을 하고 3주 하고도 조금 넘게 있다 돌아올 여정이어서 그 어떤 여행보다 기다려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남편도 둘째도 남겨두고 큰아들을 만나러 가는지라 나는 왠지 그 시간들이 조금 더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오랜만의 장거리 비행에서도 오가며 쌓인 생각들을 목차를 써 내려가듯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시간은 여기서 보다 더 빨리 가서 일을 한답시고 노트북을 챙겨 왔더라면 얼마나 짐스러웠을까, 남편 말 듣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드디어 갖게 된 나만의 시간


중국은 한국과 달리 상당히 긴 연휴들이 있다. 가을의 국경절과 겨울 춘절에는 기본 짧게는 1주일, 길게는 10일까지도 쉬게 된다. 특히, 중국의 춘절은 실로 대단해서 그야말로 이 넓은 땅의 민족 대이동으로 전체가 들썩이는 기간이기도 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한 주간 수업을 하자 이번만큼은 밀린 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리라 다짐한 춘절 연휴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행복했다. 이런 시간이 너무 간절했기도 했고, 필요하기도 했다. 나는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매 순간 감수성이 폭발하는 감성적인 사람이고, 청춘을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사내 신입승무원을 양성하는 강사로서 늘 여러 사람들 앞에서 지내다 보니 사회성이 좋아 보이지만, 일상을 벗어나면 오히려 사람들 틈에 서있는 게 부담스럽기도 한 내성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요즘 이런 말은 시대와 맞지 않는 말 일지 몰라도, 나는 또 천생 여자이기도 하다.  설거지 후 반짝반짝 빛나는 그릇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좋은 향이 나는 빨래를 탁탁 털어 뽀송뽀송한 햇살 아래 말리는 일이 행복한 사람, 햇살이 창으로 깊게 들어오면 그 햇살이 퍼지는 책상에 앉아 일을 할 수 있음에 크게 감동이 되어 마음이 울컥해지는 사람,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그 모습만 생각해도 마음이 설레어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재미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춘절 연휴가 시작되기도 전에 도우미 아줌마는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가 2월 하고도 둘째 주 즈음에 돌아오겠다며 떠난 터라, 나에게 이 기간은 마치 아주 긴 휴가처럼 많이 달콤할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나는 차분하지만 발그레한 설렘으로 내 시간들과 마주했다. 


그 사이 나는 노트북의 모든 공간을 잠식하고 있던 사진 파일들의 정리를 끝냈고, 핸드폰에 저장된 그 무수한 사진들을 마치 섹션을 나누듯 그룹을 지어 정리를 해 두었다.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 일을 앞으로 또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을 때가 많은데,  그렇게 방향을 잃고 나침반 없이 일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껍데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 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조금 더 명쾌한 삶의 지도를 갖고 싶어서 나는 그 생각들도 되짚어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이 일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인가, 그렇다면 더 기쁘게,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루, 이틀...  그 하루하루가 너무 좋았다. 금방 답을 찾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대답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지긋이 앉아보는 하얀 책상, 읽고 싶은 책을 한편에 쌓아두고 바라만 보아도 좋았다.  책을 읽다 메모를 끄적이기도 하고,  사진을 정리하다가 소파에 누워 다시 책을 읽기도 했다. 손이 빠른 편이어서 삼시세끼 뚝딱 차려서 함께 모여 호로록 식사를 맛있게 하는 일도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한에서 폐렴이 시작됐다고 했다. 







이 터널의 끝에서 빛을 만나고 싶다.



대수롭지 않았다. 매번 그런 일들은 언제나 내 생활의 바운더리 저 끝 어딘가에서 아무 영향력 없이 시작되었다가 끝나버리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뉴스에 우한이 비쳤다. 어느 날에는 거리를 걷는 사람이 쓰러지는 장면이 인터넷 뉴스에 올랐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우한을 봉쇄한다고 했다. 그리곤, 춘절 연휴가 한 주 더 연장되었다. 


지금 상해에 얼마만큼의 교민이 남아있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많은 교민들이 이미 한국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우리도 아이들이 어렸다면,  아무 주저 없이 벌써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다. 폐렴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 가는 일부터 난감해지는 상황이니까. 사람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이런 어둡고 답답한 터널을 걸어가는 일이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질 거라고는 막연히라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중국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로 신종 코로나에 전염이 되었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아버지일 또는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고 엄마일 많은 사람들이 의사로서, 간호사로서, 환자로서 마주해 최악의 전쟁터와 같은 그곳에서 버텨내고 있었다. 


인터넷 뉴스에서 우한의 고립된 교민을 위해 전세기를 띄운다고 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막연했을까 마음이 울렁였다. 나도 이곳 상해에서 교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보다 모든 것이 더욱 크게 느껴졌고, 진행되는 모든 상황을 한걸음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는 이 현실이 가끔은 오히려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감사했다. 모두가 무사히 잘 돌아갈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우한 교민들이 우리나라로 돌아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을 보게 된 아침, SNS에 이어진 손글씨 응원글들을 마주한 그 아침엔 눈물이 났다. 따뜻이 안아준 진천과 아산분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은 그날 아침 그렇게 나를 펑펑 울게 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를 떠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도 마음이 무너지지만 어쩔 수 없는 두려움으로 물러서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것도 다 이해해야 하는  안타까운 시간. 이렇게 커다란 전쟁 같은 일들을 하루하루 피부로 느끼면서  잠잠했던 내 마음도 조금씩 출렁이고 있었다. 얼마나 더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야 우린 우리 앞에 늘 펼쳐지던 평범하지만 소중했던 그 빛과 만날 수 있는 걸까.







봄은 그래도 올 거야.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은 채 11일이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상해는 아직 너무 고요하다. 이렇게 집안에만 있다가 2-3일에 한번 마스크를 하고 집 앞 마트에라도 잠깐 나가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마치 꿈속에서 만났던 것처럼 모든 것이 너무 평화롭다. 오랜만에 햇살이 눈부셨던 오늘은 거리에 사람들이 조금 늘어났다. 아파트 단지의 동문과 서문은 이미 굳게 걸어 잠근 지 오래고, 정문에서도 외부인은 철저히 출입이 막혀서 정문 입구가 조금 복잡해진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여전하다. 푸르른 잔디와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주는 가로수들, 그리고 기다리다 못해 활짝 피어버리고만 꽃봉오리들은 시리게 파란 하늘 아래 달라진 모습이 없다. 


그리고 보니 오늘은 입춘이다. 봄이 시작되는 오늘,  나는 내 마음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다. 단단하고 작은 씨앗은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잠을 자는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나는 아마도 몇 번이고 혹시 싹을 틔우지 못하는 건 아닐까 종종 거리며 들여다보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애타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씨앗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그 기다림 끝에 온 힘을 다해 부풀어 올라 마침내 여린 내 마음 밭에 단단한 뿌리를 드리우며 푸르게 자라 날 것을  나는 믿는다. 서랍에서 작은 펫말을 꺼냈다. 하얀 분가루가 묻어나는 분필을 들고 나는 작지만 강하고, 여리지만 크게 뻗어 날 그 씨앗이 피어날 곳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어 마음속 깊이 팻말을 고정했다.


희. 망.


상하이에도 봄이 오고 있다. 그리고, 그 봄은 겨우내 매서운 바람에 한껏 웅크리고 있었던 봉우리들을 어루만지고 감싸 안아 마침내 모든 꽃들을 피우고 말 것이다. 모든 사람들과 평범했던 모든 일상이 아무렇지 않게 그 꽃들과 다시 시작되면 나는 어쩜 왈칵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우리 서로 말하진 않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거 다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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