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보라색 좋아하시죠? "
"저요? 음... 아닌데. 보라색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는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껏 보라색 옷을 스스로 사 본 기억이 없고, 보라색 신발이나 모자를 샀던 기억도 없으며, 지금 가지고 있는 옷이나 물건들 전부를 쏟아낸다 해도 아마 보라색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근데, 꽃 쓰실 때 요즘 보라 컬러 많이 쓰시던데요?"
"아... 꽃! "
유독 보라색을 좋아하진 않지만, 꽃은 보라색이 참 곱고 예쁘다. 특히, 여름철 꽃시장에서 연보라 빛으로 물들어 있는 듯, 하늘하늘 여린 꽃들을 보면 차마 두고 올 수가 없어서 마치 오래전부터 애정 해왔던 것처럼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조심스레 데려온다.
연보랏빛 꽃들에서는 왠지 여름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은은하고 청초한 향수를 뿌린 것처럼 싱그럽고 향기로워 보여서 나의 컬러 선호도와는 달리 여름이면 보랏빛 꽃들을 조금 더 많이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그 꽃들 대부분은 실제로 코 끝에 대어 보면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보랏빛 꽃들에서는 청초하고 싱그러운 여름 향기가, 혹은 시원한 바람 한 줌처럼 청량한 여름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때로는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향기가 나는 것도 같고 또, 때로는 깊이 있고 그윽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다른 계절보다 더 많이 보랏빛 향기로 작업실을 채우곤 한다.
청초함
꽃들은 각각의 컬러와 형태, 크기와 질감에 따른 '믹스 앤 매치'가 달라지면 작은 차이로도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는데, 연보라색 꽃들을 비교적 잔잔한 화이트 꽃들과 매치하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청초함을 느낄 수 있다.
상해의 여름은 대체로 38도를 훌쩍 뛰어넘을 때가 많기 때문에, 꽃들이 쉽게 시들 수 있는 고온 다습한 날들이 길어질 때는 하나 정도 내추럴하게 꽂은 조화 어레인지먼트도 작업실 한쪽에 올려둔다. 잠시 여름휴가를 다녀와도, 또 얼마간 한국을 다녀와도 시들 걱정이 없는 베이스 어레인지먼트는 비록 조화라도 보는 순간 청초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요즘은 생화로 착각할 정도로 퀄리티 높은 조화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잘 선택해서 내추럴하게 꽂아주면 생화가 주는 만큼은 아니어도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작은 힐링도 느낄 수 있다.
스카비오사 (Scarbiosa)
베이스 어레인지먼트에서 사용한 보라색 꽃의 이름은 '스카비오사'이다. 꽃들 중에는 스카비오사처럼 이름이 예쁜 꽃들이 참 많다. 우리나라에서 솔체꽃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스카비오사는 줄기가 단단한 반면 꽃잎은 레이스처럼 얇고, 전체적으로 여리고 여성스러운 느낌이 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꽃이다. 컬러는 화이트, 핑크, 연보라, 쵸코 등으로 다양하며, 줄기의 선이 아름다워서 작품에서 라인을 살려 꽂아주면 조금 더 내추럴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래서인지 왠지 조금 더 청초하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꽃이다.
싱그러움
덥고 습한 여름, 한바탕의 굵은 빗줄기가 지나가고 맑게 개인 하늘 아래 피어난 꽃들처럼 싱그러움을 느끼게 하고 싶을 때는 연보라색 꽃에 그린색 계열의 꽃이나 잎 소재들을 매치하면 좋다. 이때 매칭 하는 꽃이나 잎 소재는 컬러뿐 아니라 각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질감(텍스처)까지 함께 고려해주면 조금 더 섬세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델피니움 (Delphinium)
부케에서 사용한 연보라 꽃은 델피늄으로, 대표적인 여름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델피늄의 명칭은 그리스어 delphin(돌고래)에서 유래되었는데, 델피늄의 꽃봉오리 모양이 돌고래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화이트, 핑크, 블루, 스카이 블루, 보라 등 다양한 컬러가 있으며, 대체로 델피늄이 자라서 성장하는 평균적인 길이가 30-100cm이기 때문에 절화 상태로 꽃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델피늄들도 키가 상당히 큰 편이다. 작품 사진에서 처럼 키가 작은 부케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긴 줄기를 나누어 잘라 사용해야 한다.
청량함
컬러가 가지고 있는 힘은 실로 대단한다. 컬러를 어떻게 '믹스 앤 매치' 해서 사용했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하며 더 나아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치유함을 얻기도 한다. 초보 플로리스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컬러의 믹스 앤 매치'인데, 사실 이 부분은 색채학이나 색채 이론을 통해서 배우는 것보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스스로 발품을 팔아 직접 많은 작품을 만들어 보면서 습득되었을 때 자기만의 컬러에 대한 이해가 명확히 정립되는 것 같다.
보랏빛 꽃에 차가운 느낌의 블루 계열의 꽃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의외로 이 두 컬러들은 서로를 상호 보완해 주며 그들만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자칫 파란 꽃들이 줄 수 있는 어둡고, 무겁고, 차가워 보이는 느낌을 연보랏빛 꽃이나 하늘색 계열의 꽃들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조금 더 밝고, 가볍고, 시원한 느낌으로 끌어올려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꽃이 있는 공간을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으로 연출하고 싶다면 보랏빛 꽃과 파란색 계열의 꽃을 함께 사용하면 좋다.
아가판서스 (Agapanthus)
아가판서스는 플라워 트리 중간중간에 동그랗게 무리 지어 피어있는 연보랏빛 꽃이다. 플라워 트리에 사용한 아가판서스는 아직 꽃이 다 피지 않았지만, 꽃들이 만개하면 종모양의 꽃들이 20-30개로 무리 지어 피어나기 때문에 너무 예뻐서 감탄을 하게 될 정도이다. 백합과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여름꽃으로 줄기가 단단해서 플로럴 폼이나 물꽂이 어떤 작품에도 어레인징 하기 좋으며, 긴 줄기를 짧게 자르지 않고 투명한 유리 화병에 한 두 송이만 꽃아 두어도 공간이 시원해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꽃들의 채도를 적절히 조절해 사용함으로써 깊이 있고 그윽한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만든 생화 리스와 센터피스]
깊고 그윽함
여름이라고 늘 밝고 가벼운 톤으로 꽃을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다. 꽃이 어우러지는 장소나 상황의 특성에 따라 꽃들도 채도를 조절해서 적절히 믹스해 사용하면 묵직하지만 과하지 않고, 산뜻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게 연출할 수 있다.
카네이션 (Carnation)
카네이션은 장미, 국화, 튤립과 함께 세계 4대 절화로 취급되는 꽃으로, 요즘은 다양한 컬러의 카네이션을 콜롬비아 수입 카네이션으로 만나볼 수가 있다. 사진의 생화 리스 안에도 채도가 낮은 짙은 보라색의 콜롬비아 수입 카네이션을 사용해서 전제적인 분위기를 조금 더 깊고 묵직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네이션은 절화 상태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생명력이 긴 꽃이기 때문에, 사무공간이나 홈데코레이션 용으로 쉽게 시들지 않는 꽃을 원한다면 콜롬비아 수입 카네이션을 추천할 만하다.
사랑스러움
연보랏빛 꽃들로 좀 더 사랑스럽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싶다면, 핑크 컬러를 매치하면 좋다. 꽃을 구입할 때 어떤 꽃들을 사야 할지 감이 안 온다면 콘셉트로 잡은 컬러를 기준으로 조금씩 채도를 높이거나 낮춰가는 쪽으로 꽃들을 선택하면 실패할 확률은 낮아진다.
겹 튤립 (Tulip)
네덜란드의 상징인 튤립의 원산지는 사실 터키라고 한다. 여러 겹의 잎을 가지고 풍성하게 피어나는 겹 튤립은 꽃잎 한 장 한 장이 무척 예쁘고, 만개했을 때의 모습이 우리가 늘 보아오던 튤립과 달리 화려하고 더 아름다워서 이 꽃이 튤립이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 결혼식 부케로도 인기가 많은 튤립은 한송이만 유리 베이스에 꽂아두어도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낼 수 있어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는 꽃이기도 하다.
산뜻함
모던하면서도 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다소 무게감 있는 보랏빛 꽃들과 화이트 계열의 단아한 화형을 가지고 있는 꽃들을 대비하여 어레인징하면 좋다. 컬러를 대비하여 사용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에, 두 컬러를 이어주는 꽃들의 채도를 잘 조절하여서 사용하면 컬러의 대비로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산뜻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아네모네
처음 아네모네를 마주 대하면 대부분은 '아, 아네모네는 네모나지는 않네요!' 라며 이렇게 예쁜 꽃인 줄 몰랐다고 한다. 아네모네는 그리스어인 '아네모스(바람)'에서 나온 이름으로, 하양, 빨강, 자주, 보라 등 다양한 색으로 피어난다.. 화형이 무척 사랑스러우면서도 단아하고, 컬러도 마치 곱고 진하게 염색을 한 것처럼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한번 보면 바로 사랑에 빠지는 꽃이기도 하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아들 에로스가 쏜 사랑의 화살에 맞아 아름다운 소년 아도니스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사냥을 나간 아도니스가 죽자 아도니스가 흘린 피를 꽃으로 만들었다" 고 하는데, 그 꽃이 바로 아네모네이다. 그래서인지 가슴 아프게 꽃말도 '속절없는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9월을 목전에 두고 햇살은 이미 예전 같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찢어질 듯 울던 매미들은 언제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를 이제는 가을 풀벌레들이 채워주고 있다. 여전히 아쉬움에 툴툴거리며 한낮 열기를 쏟아내지만 이미 진을 많이 뺐을 여름 햇살도 지금은 우리가 투명하고 향기로웠던 보랏빛 여름과 작별을 해야 할 때와 왔음을 말해준다.
이제 나의 팔레트에는 가을 색이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많이도 애정 했던 청초하고 은은한 한 여름의 보랏빛은 조금씩 조금씩 지워져 갈 것이다. 때로는 청량하고 산뜻하게 또, 때로는 싱그럽고 사랑스럽게 여름 내내 많이도 그렸던 그림들에서 짙어지는 가을에는 또 어떤 그림들을 그려나갈지, 다시 재회하게 될 가을꽃들과 가을 색들이 기다려지고 설렌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과 함께 했던 시간들과의 작별은 인생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 순간 작별은 아쉽다.
이제 정말 여름이 간다.
가을이 오고, 모든 것이 깊고 짙어진다 해도 잊지 않을게.
고마웠어, 보랏빛 여름.
짜이찌엔, 보랏빛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