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밍키 Oct 09. 2021

그들은 금을 긋는 것을 좋아했다

소유하기 위해서




*아주 사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제 tmi를 바라지 않는 독자님들은 패스해주세요.




타이포잔치 2021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나를 괴롭히는 것은 소속감이다. 그것은 사실 소속감을 빙자해서, 나 자신은 내 소유가 아님을 인정하라는 강요였다. 소속이 없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소속이 불분명한 사람을 배척하고,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에겐 정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고등학생 때는 남들보다 좋은 대학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다 풀지도 못할 참고서들을 돌덩이처럼 지고 다녔다. 망한 수능 성적표를 받고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은 듯한 절망에도 빠졌다.


대학 졸업반이 되자 이번엔 내가 소속될 회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인사 설명회를 안 들으면 이 사회에서 낙오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면접을 봤는지 정장과 쪽진 머리를 하고 학교를 배회하는 친구들이 곳곳에 보였다. 좋은 소속을 갖게 된 친구들이 부럽긴 했지만, 그 시기부터 난 어딘가 소속되기 위해 애쓰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나홀로 분투는 언제 끝이 날 수 있을까. 이젠 한 가족의 엄마가 되기를 요구받는 나이가 됐다. 대학과 직장에 소속되어야 했던 과거보다 더 강한 거부감이 든다. 그 거부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변하면 따라붙는 환멸 나는 질문들. 정신 건강을 위해 방어적으로 말을 줄인다. 결혼을 통해 묶이는 파트너의 필요성을 알지만, 누군가의 와이프로 소속될 것 같은 불안감에 지난 연인들의 손을 모두 놔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소속감을 왜 이렇게 극도로 거부하는가 생각해봤다. 여자라는 그룹에 속해있어서 받았던 충격들이 강한 반감으로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남자 회장과 여자 회장이 따로 있었다. 난 여자 회장이었는데 남자 회장의 백업을 맡는 부회장의 역할을 했다. 선생님께 같은 회장인데 왜 내가 덜 중요한 일을 하는지 따져 물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장래희망을 적어서 사물함에 붙여놓으라고 했다. 내 꿈은 교수였다. 도덕 선생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여자들은 결혼하고 애 키우려면 선생님 되는 게 최고의 신붓감이야."

그냥 선생님을 꿈꿀 수도 있지 그게 왜 신부의 조건이냐고 또 따져 물었다.


여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직업에는 알파 값이 존재했다. 백업 혹은 내조하기 편리한 직업이냐다. 그것이 여자라는 집단의 룰이라면 소속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따져 물었다. 누가 정한 우리 집단의 룰이냐면서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만 내 소속을 부정하는 형태를 뗬다. 그렇게 되면 나의 탄생마저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암울한 장면이 펼쳐진다. 이런 생각은 꼬리를 물고 학창 시절 나를 옭아맸다. 그럴 때마다 이 생각을 외면하고 소속된 집단에서 적응을 잘하는 척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남자라는 집단에 속해서 받았던 충격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고 공감한다. 다만 내가 경험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써 내려가지는 않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속한 집단의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꾸준히 교육받는다는 거다. 이 선을 넘으면 지뢰가 터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선을 넘어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이 좋아진 경우도 있다. 내가 받은 교육이 오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을 때 분노가 일었다.





내가 야행을 좋아하는 것은 이런 이유와 밀접하다. 낮에는 사원증, 교복, 간판, 학교, 아파트, 건물에 붙어 있는 온갖 소속명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밤에는 모든 빛이 꺼지고 주인 없이 나뒹구는 인간과 동물과 물건이 지천에 널려있다. 분노를 식히기 위해 주인 없는 달빛을 따라 밤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그들은 금을 긋는 것을 좋아했다.
금을 그은 곳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뒤 말했다.
"너희들은 나의 소유야. 이제 안전해"



며칠 전 갔던 전시에서 본 작품 속 문구를 생각한다. 야행을 하며 다시 생각에 빠진다. 금을 지워도, 벽을 깨도, 지붕을 날려도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소유다. 나의 안전은 소속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온다. 이번엔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외면하지 않고 고이 접어 꽉 쥔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걷는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4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