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지금 자신 혼자서 일하느라 등골이 빠지겠다고, 하루빨리 후임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문득, 장난치고 싶은 마음에 "야. 너 후임 들어왔는데 너보다 5살 많다고 말 놓자 하면 어떻게 하게?"라고 화두를 던졌다. 처음에는 "에이~ 말도 안 되죠. 그럼 바로 주임원사님한테 이야기해야죠."라고 답하길래 "근데 신병이,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강일병 님(가명)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라고 되받아쳤다. 요즘 군대에선, 상병, 병장의 말보다도 신병의 말이 더 큰 파급력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다. "그러면, 일 같은 것 다 몰아서 그냥 시키면 되죠. 그러면 지도 저한테 잘해야겠다 생각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흔히 공동체 사회에서 암묵적인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일이다. '못되게 굴기'. "그런데, 자꾸 일을 안 배웠다고, 다른 핑계 대는 그런 폐급 신병이면?" 한번 시작한 장난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막내의 반응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번을 주고받더니, 할 말을 잃은 막내는 점점 막내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안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 옆에서 "야야, 막내야, 후임이 ~~ 하면 어떻게 할 거야?" 하면 손으로 허공에 선을 긋더니, "Stop... 이젠 Stop입니다. 박상병 님." 이러면서 자리를 뜨곤 했다.
군필자라면 방금 대화가 어색할 수도 있겠다. 애초에 투고인 나와 막내의 대화라곤 믿지 못할 정도로 막내가 자유롭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전형적인 다나까체를 쓰고 있지도 않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 부대는 병 사이의 군기를 최소화하려는 부대가 되었다. 그건 어쩌면 P급이었던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병 초부터 자살 생각의 상담받기도 하고, 작은 실수부터 큰 사고까지 내가 다 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우리 부대원들과 '명백한 상하관계'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신병이 들어왔는데 나한테 반말하면, 그니깐 나를 선임 취급 안 해주면 어떡하지?'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규정이 전부인 군대에서 명확히 상급자를 '존중'하지 않는 하급자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나를 선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떤 강력한 룰이 아닌, 후임들을 비롯한 부대원들의 '인정'이었다. 내가 군대 선임스러운 위치와 행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모든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있지도 않은 '반말하는 신병'을 통해 내가 속해있던 군대 분위기가 허상일 뿐임을 알았다. 사회에서는 화내지 않을 만한/혼나지 않을 만한 일이 군대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이유가 그저 허상인 분위기에 속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굳이 비약하자면, 지금 나와 부대원 사이 관계는 선임-후임 역할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 왜냐면, 명시적인 군대 규칙이 실질적으로 현 선임-후임 관계를 만들어줄 수는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병과 병 사이에는 분대장/생활관장/으뜸병사가 아니면 명령할 수 없다. 되려 으뜸병사가 내 후임이어도 으뜸병사는 내게 지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리학도로서 딱 한 마디만 더 얹자면, 허상이니깐 허술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거울 역시 허상이니깐 말이다.
'반말하는 신병'은 사실 내 사고방식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반례'를 대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말하는 신병은 내 가치체계 속에서 이곳저곳 다니며, 이유 없이 믿고만 있었던 명제들을 뻥뻥 차 버린다. 무너진 명제들을 다시 세우면서, 난 그것들의 근거를 재확인한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그걸 악용하려는 사람처럼 끝까지 확인한다. '그래서 이건 아니지? 이렇게는 해도 되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이 다시 세워진다. 당연하다. 사회에서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과 거대한 흐름에 의해 세워진 사실들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세워진 내 가치체계들은 나에게 훨씬 더 많은 관점을 선물해준다.
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믿고 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지식의 탑을 쌓기 바빠, 이유도 모르면서 막대를 세운다거나, 인과관계가 뒤집혀 거꾸로 막대를 세우기도 한다. 자신이 얼마큼 아는지 모르고 자신이 얼마큼 모르는지 역시 모른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흘러간다. 물에 술을 타든, 술에 물을 타든 둘 다 맹탕이겠지만 말이다. 논리적인 비약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막대를 세울 수 없다. 그저 남이 세우는 대로 따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딱 그대에게 필요한 건, '반말하는 신병'이기 때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