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진작에 다 본 [슬기로운 의사생활] 요즘 애청하고 있다. 주마다 다음 편을 기다릴 참을성이 없기에, 재밌는 드라마가 나왔다고 친구, 예능, 뉴스 등 온갖 군데서 난리 쳐도 꾹 참는 편이다. 정해진 시간에 맞출 여유도 없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휴일은 워낙 시간이 남다 보니 챙겨볼 수 있었고, 워낙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였는지라 새로운 시도를 무서워하는 나 역시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잔잔한 드라마기도 하지만, 전개에 있어서 참신하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드라마에선 몇 씬과 몇 화에 걸칠만한 '갈등'들도 여기선 그저 대사나 장면 하나로 퉁 쳐져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이익준'이 자신의 아내가 바람났다는 것을 알고 이혼했단 사실을 후에 간호사와의 대화에서 "이젠 실질적 홀아비니깐요."란 대사를 통해 설명한다. 간호사도 크게 반응하지 않으면서 '이혼한 사실'을 이미 병원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이밖에도 시간의 흐름이나 인물 간의 관계 변화 등을 간접적으로 잘 설명한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정확히 집중해야 할 이야기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부담스럽지 않게, 또 너무 생략하지도 않은, 보면 볼수록 연출의 참신함에 감탄하는 작품이었다.
해당 씬은 다른 장면이지만...
드라마를 보다장난 삼아 현실 친구들에게 "연대 의대 붙었을 때 갈 걸."이라며 기만 섞인 카톡을 보내면 그들은 깔깔 웃곤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 5명의 99학번 동창 의사들은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주말, 워라벨 같은 단어들이 어색할 만큼 고된 삶이고 집중력을 역시 놓치지 못하는 최악의 근무 환경이지만 각 인물들이 부럽다. 바쁨에도 취미를 유지하는 부지런함과 응급 사항을 해결하는 능력, 둘 다 부럽지만 가장 부러운 것은 역시 그들의 우정 아닐까.
아무리 친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는 말은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 난 그런 왈가왈부함을 무시하는 우정이 늘 부러웠었다. 친구의 흑역사를 농담거리로 써먹는다거나, 같이 먹는 음식의 대부분을 먹어버리고 역정을 낸다거나 하는 우정 말이다. 물론 그런 선을 지키지 않는 우정들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지만, 내가 갖고 싶다란 생각이 들만큼 두터운 우정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선을 그어두지 않았다.
먹는 속도가 빨라, 대부분 음식을 먹는 채송화(좌), 김준완(우)
우리 중학교에서는 '축구부'가 내가 부러워하는 우정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때는 정신 차려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 당시에는 '축구부' 대부분이 좀 노는 친구들이었다. 술 담배도 하고, 험한 말도 쓰는? 학교폭력의 주범까지는 아니었지만, 반의 실세들을 맡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서로 심하다 싶은 말을 하곤 했었다. 별 도덕적이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지만 허세 가득한 말 말이다. 또는 친구의 약점을 웃음 삼아 놀리기도 하고, 너무 심하다 싶은 장난을 스스럼없이 치기도 했다. 그런 껄렁껄렁함은 그때는 몰라도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어지는 우정을 확인했을 땐 조금, 아니 많이 부러웠던 것 같다.
대학 친구보다 고등, 중등 학창 시절 때 친구들과 더 오래간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 아닐까. 자신의 언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 되어 쌓은 우정이 더 건실할진 몰라도, 그만큼 더 명확한 선 때문에 쉽사리 친해지지 못하는 것 아닐까.물론 언제나 그렇듯 사람 by 사람이고 이에 대한 글도 썼지만, 학창 시절의 친구와 대학 생활하면서 생긴 친구 사이는 누구나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것저것 핑계 댔지만,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도 그렇게 친하지 않다. 학교에서 같이 놀며 공부했던 친구들인데 어느새 나만 빼고 여행 간 인스타 스토리를 확인할 때면 괜히 위축된다. 농담인 척 서운했다고 오랜만에 만난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면, 되려 내가 대학 인싸라서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고 말한다.
선을 지키기엔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 역시 친하지 않은걸 보면, 우정을 유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란 생각을 한다. 우정 사이 선을 지워놓으면 저절로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말이다. 분명 선을 지키는 것과 거리를 두는 것 사이 적당한 지점이 있을 텐데, 아직까진 친한 사람도, 친해질 사람도 너무 어렵기만 하다. 신경 쓰지 않으면 상처가 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만, 신경 쓰면 어느새 우정 위로 선이 그어져 버린다.
결국 내가 원했던 건, 싸워도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 친구였다. 난 어째선지 친구와 한번 대판 싸우면 대부분 거리가 멀어졌다. 오해를 잘 풀고, 화해를 잘하더라도, 싸우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화해의 과정 속 어쩔 수 없이 내 가치관을 접은 자국 때문인 것만 같았다. 100% 납득하지 못한 채 상처를 덮자 흉터가 남았고, 만질 때마다 아쉽곤 했다. 친구와 '잘' 싸울 자신이 없었던 나는 '안 싸우면 그만이지.'란 생각으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 거리를 두거나 애써 피하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친한 사람은 꽤 있는데, 베스트 프렌드가 없다. 1년에 1번 정돈 내 멋대로 성내도 이해해주거나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 친구 말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구구즈(주인공 5명)는 투닥투닥 계속 다툰다. 하지만 다투면서도 절대 서로가 멀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화면 밖으로까지 느껴진다.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함과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도 같이 느껴진다. 누군가 나에게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꼭 봐야 하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소소하지만 변치 않는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 말할 것 같다. 당연한 것이 얼마나 값진 지 잘 알 수 있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