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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n 27. 2024

한 모금에 10만 원짜리 와인을 마셨다.

와린이 와이프의 한 모금 평점, 5.0 /남편의 애정 당도 매우 높음

"아직 안 잤지?"

잠이 들랑 말랑 하는 시간에 남편이 들어와 나를 깨운다.

뭐지? 저 당당함. 술 먹고 들어온 남편에게서 개선장군의 포스가 느껴진다.


"빨리 와봐. 내가 당신 주려고.... 10만 원, 아니 한 20만 원은 될걸?"

일단 돈이라는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난다.

가야지. 단박에 몸을 일으킨다.  

주방으로 간다. 백화점 쇼핑백이다.

저, 안에 10만 원, 아니 20만 원쯤 하는 그 무엇이 들어있다.

백화점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와인 두 병이다.

10만 원 이상 되는 와인을 마셔본 적이 드문지라 나에게는 횡재다.


어? 근데, 새 병이 아니다.

게다가 병의 밑바닥을 보니 한 잔, 아니 한 모금이 될까 모르겠다.

'이 와인이 말이지,  샤또 어쩌구인데 세계 와인 중에 손꼽히는 5대 샤또 어쩌구~'

남편이 수다스러워진다. 와인 자랑이 늘어진다.


어쩌구의 결론은 이게 한 모금이지만 10만 원 이상은 할 거라는 것이다.

와인 한 모금에 10만 원이라...

이걸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황송하다고 해야 할지.

자기는 이 좋은 걸 두 병이나 마셔놓고, 겨우 한 모금 남겨 온 게 저리 당당할 일인가?

괘씸해지려는 순간, 여전히 환희에 찬 남편의 얼굴을 본다. 


남편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이런 와인을 마셔볼 일 없는 와이프에게 한 모금이라도 남겨주고 싶었을 그 순간, 말이다.

오늘 와인 애호가이자, 부자 지인은 좋은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 남편을 픽했다.

남편은 와인 가격에 걸맞게 품격과 너스레 섞인 단어를 적절히 골라 분위기를 띄웠을  것이다.

마음은 이미 프랑스 포므롤 지역을 거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순간, 집에 있는 누군가가 생각났었으리라.  2~3만 원짜리 마트 와인이나 마셔본

와이프에게 반드시 한 모금 바치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친애하는 애호가님께 마지막 한 잔을 따르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남편은 딱~ 한 모금의 분량을 남기기 위해,  손목 스냅과 와인병의 각도를 교묘하게 틀었을 것.

한 모금 성공!

마무리 멘트는 "와인병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

이거야 말로 눈물 젖은 동냥 와인 아닌가?


와인을 잔에 따른다.

와인잔 바닥이 달랑 말랑 한다.

와인잔을 든다.  

10만 원을 넘긴다.

~~

리얼한 리액션이 절로 나온다.

입안에서는 묵직하면서 고급스러운 향이었다가 목에 넘길 때쯤이면 마법같이 사라진다.

진짜 예술 아니 마술 같다.

안타까운 건 나머지 한 병은 그나마 한 모금도 안 된다는 것.

잔에 따르면, 잔에 묻어나니 차라리 병나발을 하란다.

만원 어치쯤 될까? 시키는 대로 와인을 병나발 한다.

역시 혀끝에 묵직한 고급스러움이 닿았다가 사라진다.

왜, 남편 와인  한 모금을  남겨왔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다.


한 모금에 10만 원?

들킬까 마음 졸였을 남편의 수고비도 있으니, 0을 하나 더 붙여준다 해 과하지 않을 듯싶다.





와린이인 내가 소믈리에를 대신하여 감히  평점을 매겨본다.


샤또 페트뤼스 2004

생산지:프랑스 pomerol

품종: 메를로 100%

와이프 와린이의 평점

❤❤❤❤❤ 5.0점 / 남편의 바디감 묵직, 남편의 낯빛깔 진한 레드, 남편의 애정 당도 매우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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