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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n 14. 2024

흔들리는 난시 속에서 남편의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남편이 씻고 나온다.

내가 들어간다

선수교체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출근 전, 아침 풍경이다. 샤워 순서는 대체로 연봉 순. 많이 버는 쪽이 밥상을 받아먹을 자격이 있다고 믿기에, 적게 벌고 많이 쓰는 나는 뿌옇고 축축한 욕실로 향한다.


아침 샤워는 속도전. 특히 여름에는 수도세 폭탄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나의 샤워 시간은 길어야 10분이다. 헤어-바디-트리트먼트-칫솔질 순은 나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데 최적의 조합이다. 샤워기에 머리부터 들이민다. 머리 거품이 다 씻기기 전, 나는 감각적으로 손을 뻗어 바디샴푸 뚜껑을 두어 번 펌프질 한다. 음 ~ 며칠 전 바꾼 라벤더 바디 샴푸가 향이 좋다.


오늘도 10분 만에 완벽하게 해냈다. 남편은 여전히 파우더룸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다. 부끄러운 몸을 대충 가린 나에게 한 마디 한다.


"당신, 요즘 바디샴푸 안 써?"

"쓰지. 왜"

"바디샴푸, 안 사?  며칠 전부터 없던데."

"몬 소리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축축한 욕실로 들어간다. 젠다이 위에 올려져 있는 헤어, 바디 트리트먼트의 바디를 본다.

없다. 진짜 바디샴푸는 없다. 새로 바꾼 샴푸는 바디샴푸가 아니라 그냥 헤어샴푸다.

그럴 리가 다시 눈을 부릅뜬다

정확히 ooo shampoo.  흔들린다. 글씨가 번진다. 이게 다 점점 심해지는 난시 때문이다.

이미 7, 8년 전 제품정보 같은 자잘한 글씨는 보이지 않은 지 오래. 탈모에 완화 정도의 기능만 있으면 샴푸의 자격은 충분하다. 왜,  나는 헤어샴푸를 몸에 바르고, 그 향에 심취해 있던 걸까? 10분 만에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부주의를 만든 걸까? 영어라 헷갈렸나? 바디샴푸가 훨씬 제형이 묽은 텐데 눈치채지 몰랐을까?

정말 잘 보이지 않은 거면 샤워용 돋보기라도 써야 하나?

이 나이에 노안은 당연한 것. 떨리지 않은 게 다리까진 아니니 다행이라 여겨본다.

뭐, 몸에도 털이 있으니 헤어샴푸도 나름 괜찮은 쓰임이라 위로해 본다.


그나저나 남편에게  당신은 뭘로 씻었냐고 물었더니, 요즘은 그냥 비누로 닦는다고 한다. 비누도 거품이 잘 난다며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고 한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고기까지 씹을 기세다.


머리를 말리는 남편에게서 샴푸 냄새가 난다. 내 바디향과 같은 라벤더.

흔들리는 난시 속에서 남편의 샴푸향기가 느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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