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다
중고교 시절, 나는 공부보다는 책이나 신문을 펼치는 것이 더 신나는 아이였다. 종이 냄새와 잉크 묻은 활자 사이에서 조선희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그 이름이 붙은 글에는 낯선 품위가 있었다. 단순히 "잘 썼다"는 감탄이 아니라, "이건 뭔가 다르다"는 직감.
그렇다. 조선희 작가를 처음 만난 건 한겨레신문 지면에서였다. 당시 기자였던 그녀의 문장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평범한 활자를 넘어 뭔가 달랐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그녀가 쓴 거의 모든 것을 읽기 시작한 것은.
조선희 작가에겐 기자의 언어, 평론가의 언어, 소설가의 언어가 있다. 서로 다른 세계의 말을 동시에 구사하는 이 작가는 언어의 경계, 그 장벽을 우아하게 무시한다.
그녀는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들었고, 낯선 것들은 친밀하게 다가오도록 했다. 나는 마치 재즈 뮤지션이 클래식 홀에 등장한 것처럼, 새로운 리듬과 어법으로 글쓰기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고 느꼈다.
1995년, 씨네 21이 창간되고, 나의 친애하는 조선희 기자가 초대 편집장이 되었기에 나는 용돈을 아껴 영화 잡지를 사 모으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때로는 영화보다 편집장의 편지가 더 인상적일 때도 있었다. 따뜻한 눈으로 날카로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내가 처음 본 '멋진 언니'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조선희 편집장은 소설을 쓰겠다며 돌연 씨네 21을 그만두었다. 오랫동안 내면에 품어왔던 소설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문학을 사랑했던 그녀가 기자가 되고, 영화잡지 편집장이 되면서 자신의 본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감에 쫓겨 기사를 쓰고, 다른 이들의 글을 다듬는 동안, 그녀 안의 소설가라는 존재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그러다 어느 순간,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소설에 대한 갈망을 더 이상 숨겨 둘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용기 있게 그 부름에 응답한 것일 게다.
한겨레신문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첫 소설, '열정과 불안' 출간되었다. 그녀의 문학적 여정은 에세이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에서 직장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고민을 솔직하게 풀어냈고,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에서 일상 속 작은 빛을 포착했다.
영화평론가로서의 전문성을 살린 '클래식중독'에서는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남다른 시선을 보여주었다. 기자 시절 쌓아온 관찰력과 통찰력은 그녀의 글쓰기 곳곳에 살아 숨 쉬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코로나 이후 한국사회의 곳곳을 살펴본 책 ‘상식의 재구성’은 이 땅에 살면서 목격하고 겪는 많은 일들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조선희 작가가 쓴 다양한 장르의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설 '세 여자-20세기의 봄'이다. 이 소설은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다. 청계천에서 단발머리를 한 여자 셋이 물장구를 치고 있는 흑백 사진. 작가는 그 사진 속에서 역사의 실루엣을 본다.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한 사람쯤은 어쩌면 들어봤을 이름. 하지만 대체로는, "누구?"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이름들이다.
이 소설은 잊혀진 역사 속 여성들을 불러내는 일종의 문학적 소환으로 시작된다. 근대 한국사에서 여성들은 주로 각주로 존재해 왔다고 본다면, 조선희 작가는 그 각주를 본문으로 불러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단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에서 빠졌고,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세 여자'는 단순한 역사소설을 넘어 치밀한 역사서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가는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사료를 해석하며 역사적 사실 위에 생생한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소설을 2005년 시작했으나 두 번의 공직 생활로 중단됐고 12년 만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영상자료원 원장,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같은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세 여성의 이야기가 계속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들의 이념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대신 삶을 들여다본다. 뜨겁게 사랑했고, 열렬히 믿었으며, 때로는 절망했던 사람들. 이 책은, 슬프고 아름답고 뜨거운 연애소설이다. 다만, 주인공들이 동시에 혁명가였을 뿐.
이런 그녀의 접근은 동시대 역사소설가들과 차별화된다. 조정래 선생이 역사의 폭과 무게를 담아냈다면, 조선희 작가는 그 역사 속 개인의 미세한 결이 어떻게 시대를 비추는지를 포착했다.
2023년, 조선희 작가는 '그리고 봄'이라는 새로운 소설을 내놓았다. 각기 다른 대선 후보를 지지한 네 식구의 이야기다. 왠지 그들의 가족을 연상시켰다.
나는 출간 직후 열린 '그리고 봄'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질문 시간,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실제 작가님의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요?" 그녀는 살짝 웃었다. "처음에 완성도가 낮은 초고를 읽고는 실망했는지 더 이상 읽지 않아 섭섭했어요."
관객들은 웃음이 터졌지만, 그 안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가족에 관해, 혹은 가족을 등장시켜 글을 쓰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정치적 대화는 가족을 망친다"는 말이, "그래도 해야 한다"는 위트로 되돌아온다.
고양이와 커피, 작가의 오후
역사와 정치를 넘나드는 무거운 주제의 작가라고 규정하기엔, 조선희 작가의 현재 모습은 반전이다. 동대문 낙산공원 근처의 아담한 카페 '책 읽는 고양이'의 주인장이기도 하니까.
한 번은 그녀의 카페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주인장은 맛있는 커피를 내다 주었다. 창가에 앉아 봄볕을 느끼며 책을 읽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에서는 조선희 작가와 지인들이 서로의 근황과 문학계 소식을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선 종종 출판기념회가 열리기도 하고, 강좌가 이뤄지기도 한다. 어쩐지 카페라기보단 한 편의 단편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시리즈는 서명의 기록을 남기는 컨셉의 글이니, 2017년 서명의 그날로 가보자.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어느 작가의 출판기념회. 행사장 한쪽에서 조선희 작가를 발견했다. 그날 나에게는 점심시간에 서점에서 구입한 책 '세 여자'가 가방 속에 있었다. 따끈한 책을, 출간 행사장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이었지만, 마음이 두근두근 밖으로 터져 나와버릴 것 같았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몇 페이지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른 작가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상황에서 독자가 서명해 달라고 책을 내밀었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건가..." 하시며 서명해 주셨다. 작가도 나도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한다는 재미와 유쾌함을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원래 목적을 잠시 잊었던 그날의 짧은 만남은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들의 서명, 사유의 여정'이 시리즈의 첫 번째 서명자인 김영민 교수가 철학의 가면을 쓰고 유머의 칼날로 진실을 벤다면, 조선희 작가는 기자의 촉수로 역사와 현실 사이의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기자로서 그녀가 단련해 온 시각은 소설 속에서도 작동한다. 관찰하고, 취재하고, 전달하는 습관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글에는 기자 출신의 간결함과 직설적인 힘이 있다. 아름다운 문학적 수식어구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그 대신 진실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과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서사적 추진력이 있다. 마치 진실을 향해 곧게 뻗은 화살과 같은 그 문장들은 섬세한 레이스보다 단단한 강철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힘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조선희 작가는 분주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기자에서 소설가로, 편집자에서 기관장으로. 그 다양한 역할 속에서도 그녀는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그 목소리들을 힘 있게 담아내는 작가로 남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 길을 따라가 보고 싶으니까.
출간 당시 흥미롭게 읽었던 세 여자를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금 내 친구들, 스무 살에 만난 대학동기 세 여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도 작가 조선희가 복원한 1920년대의 세 여자처럼, 2025년의 세 여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국회에서 비서관으로 일하는 써니는 지난 계엄 직후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있어야 한다"며 퇴근 직후 곧장 국회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날 밤 그녀가 걱정되어 연락했더니 '국회에 있다'는 짧은 답장만 왔다. 밤새 써니는 국회 내부에서 연설문을 작성하며 계엄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게 21세기 투쟁의 한 모습일 것이다.
미국으로 떠난 제니는 어떨까. 그곳에서 싱글맘이 된 그녀는 가끔 영상으로 소식을 전해준다. 아직 돌이 채 되지 않은 메이의 모습을 그 짧은 영상으로만 만날 수 있다.
"여기서는 매일이 전쟁이야. 어제는 메이 열이 38도가 넘었는데, 회사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었어. 결국 둘 다 겨우 수습했어. 하하."
영상 속 그녀의 웃음 속에는 무게가 느껴졌다. 낯선 땅에서 아이를 키우는 투쟁, 그것은 총성 없는 전쟁일지도 모르겠다.
"1920년대의 주세죽은 시베리아로 허정숙은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했는데, 제니는 육아와 싸우는구나."
농담처럼 말했더니, 제니가 웃으며 받아쳤다.
"샌프란시스코의 가파른 언덕을 유모차 끌고 오르내리는 게 무장투쟁보다 쉬울 것 같아?"
우리는 함께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시대가 변해도 여성의 투쟁은 계속된다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때때로 지루하고 답답한 내 직장에서 일하며 퇴근하면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투쟁이야?"라고. 맞다. 나는 총을 들지도, 위험천만했던 국회를 지키지도 않았고, 이국땅에서 아이를 키우지도 않는다. 그저 키보드 앞에 앉아 단어들을 엮어낼 뿐이다.
하지만 작가 조선희가 그랬듯이, 나도 기억을 지키는 투쟁을 하고 있다. 조선희 작가가 잊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원했듯, 나는 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벌이고 있는 조용한 혁명의 이야기를 기록할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삶은 모두의 것이니까. 승자든 패자든, 혁명가든 일상인이든,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가야 할 테니까.
써니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이 책상 앞에서. 백 년 전 '세 여자'가 그랬듯이. '2025년, 세 여자의 어떤 투쟁'을 써 내려간다. 그저 하나의 메모에 불과하더라도, 작가 조선희의 글을 읽은 자의 작은 도리, 어떤 시도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