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몽, 아기 호랑이의 어떤 꿈
녹차 아이스크림과 들꽃, 공룡인형, 롤러스케이트와 핑크 도넛과 사탕을 좋아하는 아기호랑이가 나무기둥에 기대 잠들어 있다. 뭔가 좋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다. 혹 나비가 된 건가. 나비가 된 듯한 아기호랑이의 꿈. 그야말로 호접몽이다.
도시 브랜드를 기획, 운영하는 기업 <싸이트브랜딩> 목지수 대표는 과거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깊고 슬픈 잠에 관한 연구’라는 이름의 사진 갤러리를 운영했다. 카페 한켠, 도서관, 지하철, 길 모퉁이처럼 일상의 공간에서 지쳐 잠든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짧은 글과 함께 올렸는데, 그 제목 때문인지 왠지 슬프기만 했다. 슬프지만은 않은 기쁜 잠을 표현하고 싶었다. 고갱이 기도하는 여인들과 천사와 악마가 씨름하는 모습을 하나의 캔버스에 표현한 것처럼.
고갱은 주식 중개인이자 아마추어 화가에서 본격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설교 후의 환상>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은 가운데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현실이고, 오른쪽은 상상을 담았다. 고갱의 화풍은 이 작품을 계기로 달라졌다. 굵은 선, 단순한 형태, 강력한 평면색까지 인상주의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갱의 화풍을 좋아하거나 종교적인 설정을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이 그림처럼 현실과 환상을 한 그림에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아기호랑이의 귀여운 마음을 말이다. 이 그림은 사진이나 그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 새롭게 구성한 내 최초의 작품이다.
스케치 단계에서는 꿈속 소품들의 크기가 비슷했고, 선의 굵기도 단조로웠는데, 선에 굴곡을 주고 소품 사이즈, 방향을 조금씩 다르게 바꾸면서 좀 더 다채로운 느낌이 생겨났다.
월요일, 목요일 퇴근 후 저녁 수업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데, 코로나19가 일상화되면서 출장도, 회식도 늘어나서 일주일에 한 번밖에 가지 못하거나 몇 주씩 빠지는 경우도 잦았다. 유난히 아쉬웠다. 빨리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진행한 그림이다.
앞서 두 마리 고양이와 강아지, 기린이를 그린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은 어쩔지 몰라하던 이전과는 달리 호랑이의 털 표현에 대한 부담을 조금은 줄이고, 즐기면서 그릴 수 있었다. 반면, 나무 질감은 처음이라 어려웠다.
호랑이와 녀석이 기댄 나무와 풀은 실사에 가깝게 현실적으로, 꿈속 이미지들은 가능한 단면적인 느낌으로 표현했다. 핑크색만으로도 달콤 만끽한 도넛, 아기공룡, 롤러스케이트, 꽃, 하트 모양의 빨간 사탕과 녹차 아이스크림까지 일러스트처럼 표현했다. 참, 이 호랑이는 비건이다. 유지방이 포함되지 않은 녹차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기에.
2022년은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다. 아기호랑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죄다 담고 싶었는데, 사실은 작가의 환상일 게다. 어쩌면 이렇게도 놀고, 먹고, 신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냐는 한 선배의 탄식도 있었지만 퇴근 후 두 시간 남짓 그리는 과정에서도 신나고 즐거웠다면 족하지 않은가.
나비는 예전에 그린 아프리카 고양이 수푸의 친구 나비와도 색을 맞춰, 연작의 느낌을 주었다. 배경으로는 옅은 보라색을 선택했다. 칸딘스키는 보라색을 어떤 병적인 상태인 슬픔을 간직한 색으로, 천경자 화백은 신비한 환상과 우울하고 고독한 양가적 감정이 종합된 것이라고 했다. 누가 뭐라든 환상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색은 보라가 아닐까 싶다.
이 그림을 그리던 중에 천경자 화백의 평전을 읽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가 베트남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군인들의 대치 장면을 그렸다는 사실과 해외여행 자체가 흔치 않았던 1969년부터 아프리카, 남미, 유럽, 미국 등 여러 대륙과 나라를 여행하며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려냈고, 기행문을 신문에 연재해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평소 내가 그리기를 소망하는 아프리카 동물들을 킬리만자로산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을 발견해 반가웠다. 난 아프리카에 가보지 못한 채 초원 위의 기린과 얼룩말의 초상화를 그렸으니까.
천경자 화백의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라는 작품은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킬리만자로산의 노을 진 배경으로 얼룩말, 사자, 기린, 코끼리, 사슴 등 동물들이 노란 들판에 있다. 이색적인 풍광을 담은 풍경화지만, 즐겁기보다는 뭔가 침울하다. 특히 코끼리 등에 쪼그려 않은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화가 천경자가 오십 년 인생을 회고하는 자서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린 그림으로, 고독과 상념에 잠겨 코끼리 등에 엎드려 있는 여인이 바로 화가 자신이라고 밝혔다.
화려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였던 천경자 화백이 겉모습과 달리 그 시절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속마음은 회한이었을지도. 홍익대 미대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아프리카까지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나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낸 화가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적어도 마흔아홉이 되기 전에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 그곳의 야생 동물들을 그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던 중에 가왕께선 <세렁게티처럼>이라는 노래로 20집을 발매하셨다. 그저 마음이 분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