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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레 Sep 29. 2023

어쩌다… 삽화가

그런데, 목욕탕 소품이 마흔 개?!?!

휴일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원고 청탁이었다. 원고청탁서를 쓰고 잡지를 만드는 것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내가 원고의뢰를 받고 보니 조금 어색했다. 응?!


글을 쓰는 건 일상이니, 매체와 주제, 분량과 마감일을 간단히 확인하고 자세한 건 메일로 받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어진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대화. “아, 그리고 삽화도 좀 그려줘” 그리고 지금도 이해는, 이해가, 이해도 안 되는 나의 대답, “그러줘. 뭐”


대학 과선배인 M대표는 일상이 지루하고 의욕이 없을 때면 만나봐야겠다 싶은, 요즘 조용한데 뭘 하고 있나 찾아보게 되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대학신입생 시절 처음 그를 만난 이후 이제까지, 그는 언제나 뭔가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거나, 뭔가 흥미로운 일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자극이 되고, 궁금하고, 배우게 되는… 그런 선배다.


광고동아리를 만들고, 대학 연합 광고동아리로 확장시켜 재미난 일들을 공모하던 그는 영상광고를 만드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년도 더 전에 TV에서 왠지 독특한 스토리의 광고를 보면 난 그에게 묻곤 했다. 최근에 뭐 찍었어…?!?많은 경우,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이후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NGO를 거쳐, 영상 담당 공무원에 이르는 다양한 직업을 섭렵하더니, 지금은 도시브랜드 전문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10년 전쯤, 언급했던 ‘목욕탕’에 관한 잡지를 발간하겠다는 거다. 국내 첫 동네목욕탕 전문잡지 ‘집앞목욕탕’이다. 단순한 잡지 창간만이 아니라, 목욕탕을 주제로 한 다양한 강의와 콘텐츠, 굿즈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어 보인다.

굴뚝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까지… 역시, 독특해.

지난 2023년 6월 부산 영도 봉래탕에서 목욕탕 이용 캠페인으로                                    진행된 매끈목욕연구소의 팝업스토어 ‘몰래탕‘

올 여름호로 창간을 준비하던 계간지 ‘집앞목욕탕’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매달 25일 소책자 형태로 발행, 부산 지역에 배포되고 정기구독 회원제로 운영될 예정이다. 이와는 별도로 1월과 8월, 연 2회 매거진북 스타일의 출간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잡지의 발간 형태가 바뀌면서 처음 내가 원고 의뢰를 받은 칼럼은 12월호에 배치되었고, 앞서 계간지 일러스트로 준비했던 여러 장의 목욕탕 삽화 가운데, 내부 풍경이 잡지 중간 부분 전면에 ‘한 장으로 만나는 목욕탕‘으로, 목욕탕 소품을 그린 그림들이 표지로 창간호가 꾸려졌다.


그렇다. 창간호인 10월호 집앞목욕탕 표지에는 40개에 달하는 목욕탕 소품들과 인물들이 자리했다. 월간지 발간을 앞두고 편집팀이 제안한 ‘목욕탕에서 우리가 만나곤 했던 인물들과 다양한 소품들’을 난 아이패드 프로크리에이터를 이용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느낌으로 그렸다.

“그래… 목욕탕은 이랬지” 월간 집앞목욕탕의 창간호 표지와 목욕탕 소품 삽화  강마레. 목욕탕에서 만나던 사람과 소품들. 2023. 디지털드로잉.

긴 굴뚝과 짧은 굴뚝, 네모난 굴뚝과 ‘목욕합니다’ 세워두는 간판, 락커와 락커 열쇠들, 바나나우유, 사이다, 식혜, 아이스커피, 샴푸, 치약, 칫솔, 비누, 목욕탕 바구니까지. 때밀이

타월들과 목욕의자, 등밀이 기계, 드라이기, 선풍기, 우산꽂이, 목욕탕에 오는 어린이들과 아주머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가 목욕탕에서 만나게 되는 거의 모든 것과 사람들을 담았다.


일러스트 페이지 ‘한 장으로 만나는 목욕탕’에는 목욕탕 내부풍경에 엄마와 함께 들어선 한 꼬마아이를 향한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그림에 에디터의 메시지가 더해졌다.  

“어서와, 처음이구나” 월간 집앞목욕탕의 창간호 한 장으로 만나는 목욕탕.         강마레. 목욕탕 풍경. 2023. 디지털드로잉


어서 와 처음이구나!

아줌마도 어렸을 적엔

엄마 손 할머니손 잡고 왔었어

몸이 깨끗해진다는 건

마음도 깨끗해지는 거니까

잘 놀다가렴


사실, 본격적인 디지털드로잉에 앞서서 몇 년째 프로크리에이터의 기능을 익히기 위해 관련 책을 공부하고, 후배의 청첩장을 만드는 등 다양한 연습을 해 왔지만, 이런 실전은 갑작스러웠다. 거기다 이번 집앞목욕탕 잡지의 삽화들은 강마레라는 작가라는 이름으로 처음  독자들과 만난다는 의미도 있다. 강마레는 ‘강에서 바다로’라는 뜻을 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업 잡지를 만들어오고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해 온 나는 언젠가부터 직접 삽화를 그려보고 싶었다. 기업잡지 삽화가였던 에드워드 호퍼처럼 말이다.


지난봄부터 여름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 ‘길 위에서’에서는 그의 유명한 유화 작품들 뿐 아니라, 유화 제작을 위한 스케치 노트, 그리고 그의 젊은 시절 그렸던 삽화들도 볼 수 있었다.


호퍼는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전 20년 남짓  뉴욕의 광고회사와 출판사에서 프리랜서 삽화가로 일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에디슨컴퍼니, 호텔매니지먼트 등 다양한 기업의 잡지 표지도 그렸다.

호퍼는 유화를 그리기 전에 구도를 위한 스케치는 물론, 채색을 위한 메모를 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기업 잡지의 표지들

호퍼의 삽화 작품이 담긴 잡지들을 보자니, 기업에서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 기업 잡지 에디터를 포함한 다양한 홍보업무를 해오며 유화를 그려 온 내 행보와는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 엇갈리기도 한 사실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무엇보다 삽화가 흥미롭다. 삽화는 유화만큼 오랜 기간이 소요되거나 깊은 맛이 나지는 않지만 또 많고 다양한 독자들과 만날 수 있으니까.


건강을 위한 쉼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목욕탕을 기억해 주시길. 그리고 집앞목욕탕도 구독하고 사랑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집앞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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