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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터라이프 Aug 02. 2019

워킹맘의 출산 일지

쉬어가도 괜찮아

   처음 내가 임신을 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떨리는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시험을 해보았다. 아침의 회사 화장실이었다. 선명한 빨간 두줄. 축하합니다. 결혼한 지 석 달 정도 되는 무렵이었다. 직장 내에서 임신한 사실을 바로 알릴 순 없었다. 더구나 나는 아직 입사 한지 6개월 정도밖에 안된 상황이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용히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할 말이 있으니깐 점심때 회사 근처로 와줄 수 있어? 다행히 남편은 그날 회사 주변으로 흔쾌히 오겠다고 하였고, 나는 식사 도중에 말을 꺼내게 되었어. 나 임신한 것 같아. 어쩌지? 나는 그 당시 딱 서른이었다. 남편도 나보다 두 살 많은 나이었기 때문에, 요즘 시대엔 젊은 부모인 편이었다. 한동안 나는 회사에 말을 아끼고 다녔다.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자 몸이 굉장히 피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지하 식당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속에서 이상한 게 올라왔다. 웩하더니 토가 갑자기 넘어왔다. 입덧이 시작된 것이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달려가 토를 쏟았다. 사람들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 속에서 했다면 정말 민폐였을텐데… 그날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사람들 옷에 베긴 담배냄새가 원인이었다. 옆자리에 담배 냄새가 나는 분이 앉으면 속에서 또 울컥하면서 올라왔다. 화장실로 뛰어가 수차례 올리고 왔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면서까지 회사를 다녀야 하나라는 고민을 수십 번 하고.. 나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회사에 오랜 시간 앉아 있다 보니 부종이 장난 아니었다. 부종 때문에 신발도 잘 안 들어갔고, 일단 무엇보다 쉴 공간이 별로 없었다. 누워있고 싶었지만 그럴 휴게 공간이 부족했다. 일단 남자가 다수인 회사였고, 여자들도 젊은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 상황을 공유하고 공감해 줄 동료들이 부족했다. 회식이나 단체 운동회 같은 곳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관계가 차츰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건 사실 부수적인 거였다.


   예정일 한 달 전 무더운 여름 7월이었다. 더 이상 맞는 옷도 없었고, 숨도 차오르고, 땀도 많이 나고 출퇴근 길이 무엇보다 고역이었다. 지옥철 9호선을 타고 그 당시 출퇴근을 했는데, 사람들이 밀치면서 타서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내가 막 소리를 질렀다. 배가 막 사람들 사이에 끼기도 해서. 그 뒤로는 9호선도 급행은 못 타고 일반을 타고 다녔다. 예정일 한 달 전까지 버티다가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 출산휴가 잘 다녀오라는 말은 듣지 못하고 회사에서 떠났다. 바라지도 않았다. 사실 회사에서는 일할 사람이 하나 줄어드는 격이니 내가 손해를 끼치고 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나갔다. 그리고 출산 휴가 3개월, 육아 휴직 3개월 총 6개월을 쉬게 되었다.



   예정일이 지나자 나는 유도 분만 날짜를 잡았다. 정말이고 운이 없던 케이스였다. 남편은 마침 그때 미국 연수중이었고, 나는 혼자 차가운 병실에 누워있었다. 보호자가 없으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유도분만에 들어가고 자궁문은 다 열렸는데, “어머 아기가 하늘을 보고 있네요?” 이 말을 하시는 거였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이건 OP 들어가야겠네. 이렇게 말씀하셨다. OP=Operation이었다. 나는 수술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들 모두의 소원처럼 자연분만을 원했다. 아기가 내려오질 않는다는 거였다. 더 이상… 그러더니 삑삑삑~ 소리가 나면서 아기가 심박수가 떨어지고 있어요. 위험합니다. 이미 8시간 이상 유도 분만을 해서 산모와 아기 모두 지친 것 같아요. 지금 수술에 들어가도 사실상 많이 힘들 겁니다. 보호자 사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친정엄마의 사인을 받고 나는 다른 방으로 침대를 끌고 밀려갔다. 눈물이 정말 계속 났다. 남편도 없는데 수술한다는 말도 못 하는데, 차가운 수술대 위에 올려진 것이다. 마취를 하반신만 했기 때문에 다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온도가 일단 매우 차가웠고, 수술대도 정말 차가웠다. 전신마취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럼 호흡기 삽관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냥 하반신 마취로 진행되었다. 칼로 내 배를 째는 부분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고, 우두두두두두 몸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뭘 하는지 몰랐지만 아기를 꺼내는 거였다. 응애 울음소리와 함께 아기가 나왔다. 아기 얼굴을 보여줬다. 기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너무 놀라고 내 몸이 난도질당한 느낌이었다. 배나 좀 다시 꼬매 주지…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 뒤로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물도 못 마시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하고, 하루가 지났을까 침대 위에서 일어나려고 시도를 해봤는데, 몸이 두 동강 난 느낌이었다. 배가 너무 아파서 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삼일 정도 지나고 처음 걷는 연습을 해 보았다.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이 모든 건 감내해야 한다는 게 정말 원망스러웠다. 6일간 입원을 했는데, 2일간은 시어머니가 계셨고, 그다음부터는 혼자 잤다. 마지막 날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아기를 데리고 가는 날이라서 가방을 싸서 신생아 실에 다녀와야 했다. 아무도 도움을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얼른 다녀와야지 했는데, 정말 피눈물 흘리면서 다녀왔다. 왔어 보니 간호사로부터 의사 선생님은 회진을 이미 도셨다고 전해 들었다. 열이 엄청나면서 방에 돌아와 의자를 던저버렸다. 날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아기를 낳아서 이게 뭐야. 나가는 날 진료도 못 받게 되어서 분노가 솟구쳤다. 상처부위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나는 조리원으로 갔다.

   조리원은 삶은 그래도 천국이라고 하지 않았나. 마사지를 받고, 머리고 감고, 밥도 잘 먹고, 수술한 배는 계속 아팠지만 그래도 조금은 참을만했다. 모유수유도 시도해보고, 쉽잖았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다. 남편밖에 출입이 안된다는 규정 때문에 친정엄마가 방에 들어왔지만 쫓겨나기도 해서 안 좋은 면도 있었다. 사전에 남편이 없어서 이 부분은 친정엄마가 들어올 수 있도록 말을 해놨지만 그게 전달이 잘 안되었던 모양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끝나지 않는 육아가 시작되었다. 아직 3년간 진행형이다. 그래도 우리 아기는 어떤 아이에 비해 순한 편이라서 손이 덜 가고, 내가 편하기도 했다. 워킹맘 인생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와중에 나는 작년에 이직까지 했고, 남편은 서울에 있다가 지방 발령이 나서 지금은 혼자 아기를 키우면서 회사까지 다니고 있다. 정말 인생이 피곤하겠지만 꾸역꾸역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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