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문학 속으로 :
1. 중국의 전통과 현대를 잇다

by 문예무크지 오즈

2018년 10월 30일 홍콩 해피밸리의 한 병원에서 <명보明報>의 주필이자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이 눈을 감았다. 만 94세. 그가 창조한 세계는 오랫동안 아시아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다. 그의 펜을 통해 중국의 단절된 전통은 무협이라는 환상을 빌어 현대 동아시아인들의 상상계에 자리 잡았다. 힘겨운 서구화에 내몰렸던 시대였지만, 적어도 그의 세계에서 중국인이란 ‘출입 금지당한 개’가 아니었다.


김용(金庸)의 본명은 사량용(査良鏞)이며, 1924년 3월 10일 절강성 해녕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관직에 나아간 집안 자손이었고 조부는 강소성 단양현 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고, 그가 태어나던 해에는 옛 황실마저 해체되었다. 망국의 관리 집안에 태어난 김용과 그의 형제들은 가업과 비슷한 분야를 찾아야 했다. 김용에게 그것은 언론이었다. 전근대 유교 국가에서 문필은 관료의 필수적인 교양이다. 비록 김용은 신문의 판매를 위해 무협소설을 썼으나 가업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 동오대학 법학과에 다니면서 언론사 <대공보大公報>에서 번역을 하던 김용은 1948년 홍콩으로 옮겨갔다. 홍콩 이주는 김용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침입과 군벌들의 싸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란으로 황폐했던 중국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홍콩으로 몸을 피했다. 동시대 살았던 작가 장애령(張愛玲)도 상하이에 머물다가 홍콩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후 김용이 여든이 넘어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도 학업을 미처 마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뉴 이브닝 포스트(New Evening Post, 新晩報)에 입사한 김용은 만 서른한 살이었던 1955년, 첫 번째 무협소설 <서검은구록書劍恩俱錄>을 연재했다. 1959년에는 드디어 세상을 뒤흔든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김용은 자신의 신문인 <명보明報>를 창간하면서 <사조영웅전>의 속편 격인 <신조협려神鵰俠侶>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94년 자신의 지분을 정리할 때까지 김용은 <명보>에 무협소설과 정치 사설을 썼고, <명보>는 지금도 홍콩의 주요 언론으로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김용이 무협소설을 쓴 동기는 일단 <명보>의 판매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970년 46세에 마지막 작품 <월녀검越女劍> 발표 이후로 김용은 꾸준히 자신의 작품을 고쳤다. 달라진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거나 독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등장인물의 비중이나 성격, 작품 결말을 수정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의 복잡한 삼각관계가 명확하게 정리되었다). 김용이 창작욕보다는 독자를 위해 작품을 썼다는 증거이다.


김용의 대표적인 업적 두 가지를 거론하자면 첫째로 대중의 값싼 오락으로 치부되던 무협소설을 격조 있는 문학의 경지에 올렸다는 것이다. 김용의 작품에 나오는 정파/사파의 대립, 로맨스와 기이한 인연 등은 지금도 무협소설의 컨벤션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는 무협소설을 무협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비록 김용은 위대한 작가지만 김학(金學)이라는 분야는 현대 무협소설과 큰 연관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성 있는 문학이 된 것은 김용 문학이지 현대 무협소설은 아니다.

두 번째 업적이라면 김용 작품에 중국 전통과 역사, 문화 예술이 풍부하게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읽다 보면 먼지 쌓인 고문헌 속에 파묻힌 역사의 한 조각이 김용 작품에 빛나는 보석으로 박혀 있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박학다식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든 원동력이다. 그러나 단순히 박학다식을 나열한다고 좋은 글이 되지는 않는다. 무협소설이라는 형식을 걷어내고 나면 김용 문학의 전체 모습은 중국 전통문화의 거대한 모자이크가 된다. 김용의 목적에 따라 그려진 밑그림에 따라 중국의 정신적 전통은 아주 작은 조각들이 되어 재배치되어 있다. 그 밑그림은 아마도 극도로 혼란했던 근현대 중국과 홍콩의 사회상일 것이다.


김용은 자신의 작품을 영상화하는 데 매우 협조적이었다. 원작과 다른 각색에 개방적이었고 때로 저작권료를 거의 받지 않기도 했다. 말년에도 드라마 제작팀에게 친히 메시지를 보내 격려했다. 화교 시청자가 확보된 지역에서 김용 원작 영상물은 지금도 기본 수익을 깔고 가는 콘텐츠다. 저작권 개념이 미약했던 시절에는 이름을 도용한 위작도 많았지만 오히려 김용의 세계관 확장에 기여한 측면이 적지 않다. 그중 유명한 축에 드는 위작 <구음진경九陰眞經>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화와 드라마, 위작과 팬픽, 인터넷 토론 등을 통해 김용의 세계는 화교 네트워크를 타고 동아시아로 확장되었다. 누가 제일 무공이 고강하냐는 수다에서부터 의리에 대한 토론은 물론,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실 김용 문학 못지않게 흡인력 있는 플롯을 가진 스토리는 많다. 그럼에도 김용이 각별히 사랑받은 이유가 있다. 근대를 거친 아시아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아시아는 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갑작스레 전통과 단절당하고 서구화에 내몰렸다. 그 과정은 잔혹하고 힘겨웠지만 역동적이고 희망에 넘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간절히 원했지만 정작 그 꿈은 광동의 변두리 어촌이었던 홍콩에서 실현되었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어 어쩔 줄 모르는 거지처럼, 홍콩은 영국의 통치를 받으며 서구화의 길을 내달렸다. 결과는 눈부시게 성공적이었지만 홍콩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정체성 문제에 직면했다. 홍콩은 길러준 부모 영국과 낳아준 부모 중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종종 홍콩 사회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게 폭발한 시점은 바로 홍콩 6ㆍ7폭동(또는 5월 혁명)이었다. 김용이 활발하게 집필하던 때다.


낳은 아버지와 기른 아버지 사이에서 고통받는 양강, 거란족과 한족의 대립이 격화되자 그 사이에 끼어 죽음을 선택하는 소봉(교봉), 자신이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파벌을 지어 싸우는 모습을 봐야 하는 장무기…. 이러한 인물들을 김용이 그냥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당시 홍콩인들에게 김용 작품은 곧 자기 이야기였다. 드넓은 중국 곳곳에서 전쟁과 화마를 피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자유가 보장된 홍콩으로 피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서 부모를 배신하고 친구를 팔며 자식을 버려 목숨을 보존했던 사연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말하는 사람의 가슴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랜 난세를 겪은 중국인에게도 민국 시대는 유례없는 고난의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를 겪은 사람들 모두 대하소설 한 편 분량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때로는 비겁한 짓을 해야 했고, 기적적으로 귀인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공과 사, 이득과 의리 사이에 끼어 목숨을 잃거나 배신당하기가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차마 내어놓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김용 문학에는 난세를 겪은 중국인들의 이야기들이 환상과 무협의 힘을 빌려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오랫동안 김용 문학은 중국 본토에서 금기였다. 전통을 무조건 악습으로 규정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물론이고 합리적 세계관을 근간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와 맞지 않기도 했지만, 번번이 윗사람과 부딪치고 뛰쳐나가는 젊은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일 게다. 김용 작품 속 젊은이들은 대개 반항적이다. 심지어 바른생활 사나이의 대명사 곽정도 반항을 한다. 이유는 물론 정(情)이다. 김용 문학의 장점은 사랑이라는 소재가 작품마다 다르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곽정과 황용은 의리로 맺어진 협객에 가깝고,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은 모자간 난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장무기와 조민은 활달한 여성이 주도하는 요즘 연애와 비슷해 보인다. 그럼에도 김용 문학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일관성이 있다. 평생의 배우자는 반드시 자신의 의사로 선택하며, 한 번 선택하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재미있게도 김용은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


두터운 중국 전통문화를 토대로 쓰였음에도 개인의 사랑 이야기가 중점으로 등장하는 것은 김용 문학이 서구화를 뚜렷이 지향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전근대 시대 문학에도 사랑 이야기는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잘 성사되지 못하고 내생에서 사랑을 기약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의 연인들은 죽어서야 사랑을 이룬다. 김용 문학에서도 주인공의 사랑은 늘 반대에 부딪힌다. 그렇지만 사랑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뤄낸다. 사랑을 쟁취하는 두 연인이야말로 전근대 사회와 근현대 사회를 뚜렷이 가르는 경계이다.


상업적 목적을 가진 무협소설의 특성상 사랑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그러나 김용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로맨스의 비중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마지막 장편소설 <녹정기鹿鼎記>의 위소보는 무려 일곱 명의 부인을 거느린다. 김용은 <녹정기> 이후 왜 무협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총이 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무협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변을 남겼다. 그의 말대로 무협은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 무협은 어디까지나 전근대 사회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위소보는 태연하게 축첩을 일삼는 전근대 사회의 인물인 것이다.


김용은 마지막 작품 <월녀검>에서 무협의 시조를 등장시킨다. 어린 소녀 아청은 원숭이를 흉내 내어 무공을 창안한다. 아청의 그림자를 가까스로 흉내 낸 검객들이 초식을 정리하여 월녀검을 만들지만, 아청은 별 관심이 없다. 무협의 시원은 자연이며 인간 존재는 여성성을 통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 무(武)를 통해 몸을 단련하고 협(俠)을 통해 의리를 지킨다. 이것이 중국인이다. 김용은 무협소설을 통해 제국주의와 서구화에 휩쓸린 중국인에게 전통과 현대를 연결시켜 주는 정체성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 글은 문예 무크 <오즈> 1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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