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38. Difficult Women and Roxan

: 어려운 여자들과 록산 게이

by 낙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은, 꽤 시시합니다.”


발언자의 그 말에 페미니즘 여름 캠프가 진행 중이던 장내가 술렁이던 기억이 난다. 하기사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의 2016년 한국을 강타한 책을 놓고 던진 ‘시시하다’는 발언은 청중의 이목을 끌기에는 꽤 효과적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시시한 책을 읽었고, 사실 그 책과 그 책을 쓴 저자를 통해 페미니즘에 입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보다야 부족한 페미니스트인 게 낫다”는 선언으로서의 나쁜 페미니스트(Bad Feminist)는 당시 한국에서 페미니스트가 어떤 정체성이며 어떤 실천 이어야 하는지에 일종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으니까. 그 판에 끼어 한창 남성 페미니스트 같은 고민을 하던 내게도 그 책은 큰 인상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저자를 밴쿠버 공립 도서관에서까지 발견할 줄은 솔직히 생각도 못했다. 분명 도서관 내에 끝내주는 사서분이 계시는 것 같다.


게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말이 있는데, 게이의 다른 작품이자 에세이집인 <헝거>를 두고 정희진이 같은 책의 앞머리에 (정확하진 않지만 이렇게) 적은 글이었다. “자서전과 자서는 분명히 다르다. 전자가 자기 연대기에 대한 작업이라면 후자는 자기 서술에 대한 작업이다. 그리고 나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은 채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저자(게이)가 미칠 듯이 부럽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외국 작가를 두고 이렇게 평하는 것이 인상적이었기에 나에게 게이는 여전히 자기 서술을 잘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 자기 연민이 빠진 자기 서술을 해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어서 더 그랬다.


게이의 글은 자기 서술을 했다는 점이 뛰어난 게 아니라 자기 서술을 ‘잘’ 했다는 점이 뛰어나다. 모든 글은 결국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은 결코 비유로 끝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어려운 여자들>은 작가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들이지만 에세이집인 <헝거>와 달리 단편집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을 단순히 <어려운 여자들>이 다른 작품에서 이미 했던 이야기의 반복처럼 느껴진다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한다는 것이 어떤 글이어야 하는지, 글이란 것이 작가에서 독자로 다가갈 때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질문이 어떻게 독자에게 유효한 질문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로 보였다.


한강 작가는 “소설이란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완성해 가는 작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게이의 책 또한 인종, 성별, 계급, 국가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교차점이 엮이고 섞여서 만들어진 교차성(intersectionality) 위에 위치 지어진 여성들을 통해 게이가 던지는 질문들은 유효하다. 분명 질문들은 게이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게이는 착실히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기 서술로서 질문을 완성해 간다.


그날 그 발언자가 이어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적어도 나는 시시한 글을 쓰는 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 시시하지 않아서 항상 좋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과 실천에 대해 탐구하는 <나쁜 페미니스트>, 굶주림과 욕망에 얽힌 자기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헝거>만큼이나 <어려운 여자들> 또한 읽기 잘했다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도 일독을 권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37. Decision To Go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