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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얼중독자 Apr 23. 2024

지구본

여행

요즘 여행이 너무 가고 싶은 나머지 지구본을 샀다. 내가 경험한 지구는 나를 기준으로 하여 고작 반지름 1000km 안쪽이다. 지구 둘레는 40,075km다. 나는 내 행성의 9할을 손해 보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이 행성을 꽉꽉 채워 여행하셨다. 인도의 갠지스강부터 네팔까지. 티베트의 차마고도에서 중국의 장가계까지. 틈만 나면 캐나다와 미국. 휴가 때면 주변인들과 일본, 베트남, 태국, 대만, 이탈리아, 프랑스. 나는 그녀와 동행함으로써 그나마 1000km를 채울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걱정 마, 나도 40살 넘어서 다녔어.”하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행 가기엔 뭐가 많이 없다.


항상 뭐가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없었다. 우선 돈이 없었다. 돈이 있었는데 여행 갈 돈은 없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냐고 하면, 시계에 썼다. 옷에도 썼고, 신발에도 썼고, 헤드폰에도 썼고, 책에도 썼고, 틴더랑 데이트에도 썼다. 월급은 받는 족족 빠져나가고 신용카드를 알게 된 이후에는 경고 문자와 독촉 전화까지 받아봤다. 매일매일의 소비를 즐기는 나에게 여행 갈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회도 분명 있었다. 이전에 교제하던 사람은 캐나다에 영주권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캐나다에 워킹홀리데이 신청을 했다. 그런데 웬걸, 워킹홀리데이가 합격되기도 전에 그 사람과 헤어지고 말았다. 돈과 기회 외에 분명 시간도 있었다.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해 보면 여러 군데에 썼다. 아니, 돈도, 기회도 날린 마당에 시간이라고 날리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쓴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부정사용을 의심하며 청구내역을 읽다 보면, 전부 내가 쓴 게 맞았다.


최근엔 가고 싶은 여행을 꼽아보고 있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가서 고야와 보쉬의 그림을 보기. 스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보기.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가기. 뉴올리언스 재즈바에서 진탕 취하기. 페루의 마추픽추에 오르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가기.


요즘 여행이 너무 가고 싶은 나머지 지구본을 샀다. 내가 경험한 지구는 나를 기준으로 하여 고작 면적 100,210km²안쪽이다. 지구의 면적은 510,100,000km²다. 나는 내 행성의 99.8%를 손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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