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좋아

by pahadi



오늘 저녁은 무얼 먹을까. 간단히 된장국이나 끓여 먹어야겠다. 된장국에 무를 넣을까, 배추를 넣을까, 시금치를 넣을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렵다. 어려워.

다행히 고민은 쉽게 해결됐다. 배추와 시금치는 2980원이고 무는 세일 해 1980원이었다. 당연히 무를 넣어야지. 내일은 남은 무로 소고기뭇국을 끓일 것이다.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이다.

장 본 물건들을 낑낑대며 집까지 들고 왔다. 택배를 이용하는 대신 발품을 팔았으니 환경보호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운동도 했으니 일석이조. 상쾌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요리를 시작한다.

뽀얀 무를 깨끗하게 씻고 껍질을 샥샥 벗겨 도마 위에 올린다. 아이들이 먹기 좋게 가늘게 채 썰어야지. 호기롭게 날 선 칼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그런데 두 동강 난 무가 예상과 꽤나 다르다. 겉은 뽀얀데 속이 거뭇거뭇하다. 썩었나 보네. 잘라내고 쓰면 되지.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썰어보는데 써는 족족 검은 조각들만 늘어난다.

무는 완전히 썩었다. 요리에 쓸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애호박이랑 두부만 넣고 된장국을 끓여야 하나? 그냥 배추나 시금치를 살걸. 역시 너무 아끼려고 하면 낭패를 본다니까. 막막하고 후회됐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있나. 냉장고를 뒤져본다. 마른 새우와 달걀이 있다. 애호박두부달걀국을 끓여보자. 무슨 국이냐고? 애호박과 두부와 달걀이 들어간 국이다. 달걀국이랑 비슷하겠지 뭐. 맛은 없어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

마른 새우를 달달 볶은 팬에 물을 붓고 가늘게 채 썬 애호박과 숭덩숭덩 썬 두부를 넣고 보글보글 끓인다. 알맞은 때에 미리 풀어놓은 달걀을 붓고 휙휙 젓어 간을 맞추면 끝.

얼추 그럴싸한 국이 완성됐다. 맛을 보는데 예상보다 훨씬 맛있다. 쌀쌀한 오늘 날씨에 된장국보다 맑은 국이 훨씬 잘 어울리는데? 내가 먹고 싶었던 게 된장국이 아니라 바로 이 국이었다. 덕분에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워다. 여유롭게 두둑한 배를 두드린다.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역시나 충분히 멋지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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