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무 말 없이도 통하는 게 사랑이다.

by pah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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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7-8살 때쯤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새 그림물감이 가지고 싶었다. 엄마한테 그림물감을 사달라고 열심히 졸랐지만 가지고 있는 물감을 다 써야 사줄 수 있다는 대답뿐이었다. 심통이 나서 그림물감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앉아 열심히 물감을 짜 버리고 있는데 나를 찾으러 온 엄마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차! 조금 멀리 가서 할 것을. 스스로도 잘못을 알았는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예상대로라면 혼쭐이 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화내지 않으셨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히 어린 내 손을 잡고 문방구로 가서 크고 멋진 새 물감을 사주셨다.


무슨 생각으로 집 바로 앞에서 물감을 짜버리고 있었는지 웃음이 난다. 좀 멀리 가서 하든지. 물감들이 색색깔로 아스팔트 위를 수놓던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물감을 꾹꾹 눌러짜면서 물감을 사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을 꾹꾹 짜냈다. 그리고 엄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이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내 딴에도 양심이란 것이 자라고 있었나 보다.


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딸아이가 그만큼 새 물감이 가지고 싶었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을까? 화가 나셨지만 꾹 참고 한 번만 넘어가 주셨을까? 거의 30년 전 일이지만 놀란 가슴이 아직도 생생하다. 때로는 무언이 그 어떤 말보다 강렬할 때가 있다.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으셨지만 엄마가 사주신 새 물감은 나에게 회초리이자 사랑이었다.


혼이 났다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을 것이다. 지금쯤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침묵으로 더 큰 이야기를 남겨주셨다. 그 날 나는 내 잘못에 대한 값을 치르지 못했고 그것은 내 마음속에 부채로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을 정도로 이끄는 표지판 하나가 되었다.


사랑은 표현하는 거라고 하지만 가끔은 아무 말 없이도 통하는 게 사랑이다. 한결같은 사랑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가장 편하게 투정을 부리지만 그것도 다 엄마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핑계 같을까? 그런데 요새는 내가 자꾸 엄마한테 잔소리를 한다. 옛날 일은 하나도 기억 못 하는 배은망덕한 딸이다. 오늘부터 때론 침묵으로 은혜를 갚아볼까 한다.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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