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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릴리 Aug 31. 2022

1화. 권력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 전장의 워리어

끝을 정해놓은 인사팀과 대화하는 일 D-104

어필하지 않는 전장의 워리어, 빛나는 시기에는 끝이 있다 


나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았다. 나와 파장이 잘 맞지 않는 누군가, 혹은 나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는 누군가와 애써 관계를 발전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의 일을 묵묵하게 하고 있으면, 내가 진심을 가지고 쌓아가고 있던 것들을 (시간이 비록 걸리더라도) 주변이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인맥, 역량, 일을 풀어가기 위해 들였던 노력, 시간, 전략이나 방식에 대해서 어필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해결사 역할을 기대했고, 그 기준에 맞추어 나를 채용했고, 채용한 뒤 그 잣대로 나를 평가하고 치하했고 인정했다.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드라이한 커뮤니케이션 스타일. 빠른 상황 판단과 다이렉트한 생각 전달. 나의 이런 캐릭터는 사회생활 경험에서 이 방식을 취해왔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장점을 여러차례 겪은 뒤 좀 더 강화된 것이었으리라.

정해진 시간 내 무언가를 반드시 해결해 내고 말겠다는 목표의식을 가졌을 때, 나의 스타일은 (남들이 나에 대한 불편감을 가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장점일 때가 많았다. 방송국에서 온에어 시각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완성본을 주조실로 넘겨야하는 일, 대통령 해외순방행사 현장에서 국교 정상들 앞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국회에서 정치적 이벤트를 목전에 놓고 기자들을 응대해야했던 일 등. 나는 젊고 당돌한 현장 담당자였고, 실수 없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했고, 몸집이 작은 여성으로 나보다 너끈히 열살 이상은 많은 시니어 남성들과 일을 해 오던 환경에서 무시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그 모습이 이 회사에서도 이어졌다.


이 회사에 왔을 때 - 궁극의 카오스를 경험했다. 덩치는 커졌지만 스타트업의 날 것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회사 -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 성장을 뒷받침해 줄 체계는 없었던 데다, 나에게 어떤 역할을 주어야할지 정하지 않고 나를 데려온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우선 일을 해결해달라는 요청들이 쏟아졌다), 젊은 CEO는 의욕적이었고, 규제가 강한 산업영역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출시해오면서 정부는 물론 기존 시장의 플레이어들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나는 문제들을 빠르게 파악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해결해 나가는 일을 시작했다.


이런 환경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퀘스트를 해결해야하는 전사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과 같은 느낌을 안겨주었다.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고, 조직은 나의 합류를 관심있게 살펴보았으며, CEO는 나를 신뢰했고, 회사의 문화 담당자들은 전체 조직원들에게 글로벌 회사의 다이렉트한 커뮤니케이션과 솔직함을 장려하고 또 장려하고 있었고, 내가 경험한 글로벌 회사의 문화를 배우고 싶다고 미팅을 요청해 왔다.


전장의 워리어, 자기가 던진 화살에 스스로 맞아 죽음에 내몰리다 


지금에사 깨닫게 되건데, 그 시간을 거칠 때 기존에 자리를 잡고 조직 내 나름의 역할을 해오셨던 분들의 시각각에서 상황을 아주 면밀하고 세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스케일업 중인 회사가 이야기하는 문화 지향점을 모두 실전에서 적용하는 것은 너무 순진했다. 아무리 수평 문화를 강조하더라도 오너의 심경과 캐릭터를 잘 파악하고 눈치껏 해야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 그 당시 나의 용감함과 대담함은 독으로 돌아와 (오너를 포함한) 나의 모습에 어쩐지 모를 불편감을 느끼셨던 적잖은 분들이 모두 한마디씩 나에게 부정평가를 하는 시간을 맞고 있다. 입사 후 일년간 전사 포지셔닝으로 쏘아올렸던 화살은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전사의 포지션으로 일년 간 살아내고 있던 나에게, 입사 이년차가 되면서부터는 회사가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달라졌다는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채용했을 때의 잣대로 나를 더 이상 평가하지 않겠다는 인사 조치들이 있었는데 (앞으로 100회 이상 연재할 내 글에서 분명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어떤 인사조치들이었는지), 이렇게 달라진 회사의 모습에 한동안 분노감이 들었고 모멸감과 심지어는 치욕감이 들 때가 있었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을 넘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상황의 변화를 기민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칙을 고수하며 전장에서 이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하던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과 자책이 나를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때부터 깊은 수렁이 시작되었고, 헤어나오기 힘들 것 같은 우울을 겪기 시작했다. 슬럼프였다. 건강도 안 좋아졌다. 한참을 괴로워하다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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