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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님 Jul 10. 2023

2023.7.10

230710 #일일일그림


같은 단지 안에서도 유난히 화단이 잘 가꿔진 동이 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봄부터 쪼그려 앉아 흙을 일구고, 함부로 밟지 못하도록 비닐끈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비료를 뿌려 키운 곳이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화단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제는 루드베키아, 백합, 우단동자… 친절한 꽃이름 팻말을 하나하나 읽으며 지나가다 지안이가 통통한 백합 봉오리를 가리키며 “엄마! 이거 곧 터질 것 같아요!”하고 외쳤다. 비 온 뒤 물을 잔뜩 머금은 꽃봉오리가 얼마나 탐스럽고 예쁘던지. 몇 시간이고 그 앞에 앉아 꽃이 ‘터지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화단에서 검은 점무늬가 있는 야성적인 나리꽃과 보라색 꽃을 구경했다. 보라색 꽃은 아무린 봉오리가 꼭 종이접기로 만든 별같아 보였다. “그게 무슨 꽃인지 알아요?” 경비아저씨였다.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 둥근배를 앞세운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다가오셨다. “얘들아, 이게 도라지꽃이란다. 이게 이렇게 보라색이고, 이 꽃이 이렇게 하얀색인 것도 있는데 그게 백도라지. 이거는 나리꽃. 여기 이 까만 거 보이지? 이걸 갖다 심으면 여기서 자란다고.” 쭈그려 앉은 아저씨가 살살 풀을 뒤져 나리꽃의 씨를 몇 개 주워주셨다. 땅에 저절로 떨어진 씨앗들 중에는 벌써 하얀 뿌리가 쏘옥 올라온 것들도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편 흙을 조금 파고 심어두었다.


쪼그려 앉았을 때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낮은 자세로 들여다보고 보살피며 키운 것들. 그것들이 내어놓는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 역시 쪼그려 앉아서야 보이는 것들이다.  



#1일1그림

#아파트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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