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민주시민교육과 교육과정을 마치며
얼마 전에 졸업시험이 끝났다. 십여년 만에 본 시험과 함께 2년 간의 대학원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교육청의 지원금을 받고 성공회대 민주시민교육과 대학원을 2년 간 다니게 되었는데,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혼란스럽고, 서글펐던 마음을 그나마 추스를 수 있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도 좋았지만, 대학 시절에 글로만 만나보았던 선생님들의 수업을 실제로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대학원은 내 인생에서 두번째 석사과정이다. 20대 중반 멋도 모르고 대학원을 어설프게 들어가 어리바리 석사 논문을 쓰고 군대를 들어갔었다. 그때는 정말 공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 물론 지금도 잘 안다는 것은 아니다 - 우야든동 졸업만 하겠다는 심정으로 괴발개발 써냈던 논문을 진짜 읍소하다시피 들이밀어 석사 학위를 받아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또 대학원까지 손을 벌리기 힘든 집안 사정도 있고 해서 등록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주일에 5일씩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공부란 걸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입대를 했다.
그 시절을 물론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되돌아보면 20대 중반의 나는 비교적 열심히 살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전 타임에 대학원 강의를 일주일 세 개 듣고,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11시가 넘었는데, 대학원 과제를 준비할 시간이 터무니 없이 부족해서 그때는 지하철에서 책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장면은 플라톤의 '국가'를 지하철에서 읽다가 졸음이 쏟아서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 책이 너무 두꺼워서 '쾅'하는 소리가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봤던 순간이다. 당시 교수님은 내 상황을 알고 대학원인지 학원인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셨지만, 내 처지가 그럴 수 없었기에 교수님에게 학원을 관둔다고 해놓고는 계속 알바를 했었다.
그렇다고 학원과 대학원만을 왔다갔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도학생 스터디도 했었고, 지금까지도 소중한 인연으로 남은, <불한당>이라는 무크지를 만들던 모임에도 참여했었고, 학점 교류 신청을 해서 다른 학교 대학원도 다니고, 연애도 했었으니 그 시절은 아무튼 체력과 정신력이 닿는 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어디가서 말한다고 해도 욕 먹을 정도는 아닌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부에 투자한 절대적인 시간이 많았다는 것은 아니니, 석사 논문의 질은 좋을 수가 없었다. 석사 논문을 찾아 다 태워버리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에 크게 동의했지만 어느 순간 내 논문도 디지털화되어 이제는 영원히 박제되고 말았다.
그렇게 대학원을 마치고 군대도 마치고,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직장을 얻어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어설펐던 대학원 시절에 대한 기억은 석사 논문 트라우마로 남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집을 신월동 쪽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근처에 있는 성공회대의 위명 - 누군가에게는 악명일 - 을 듣고, 전공을 바꿔 한번 대학원을 또 다녀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서울시 교육청의 지원 사업을 알게 되었고, 마침 담당 장학사가 아는 사람이기도 해서 신청 과정을 자세하게 안내받아 '민주시민교육과'에 지원하고 장학금을 받아 두 번째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원에서 나는 정말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책으로만 만났던 선생님들을 직접 강의로 만나뵈었고, 몇몇 선생님들과는 사적으로 술자리도 가지고 하면서 요새 말로 일종의 팬미팅을 경험했다. 20대 초중반 민족과 역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던 책인 <근대의 그늘>의 저자 김동춘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20년만에 책에 싸인을 받은 것도 기억나고, '바람구두'라는 이름과 사이트의 글로만 알고 있었던 전성원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사적으로도 모임을 가지면서 선생님과 친분을 쌓게 된 것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항상 먼 발치에서 존경해왔던 노동운동의 역사의 산 증인이신 하종강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던 것은 무신론자인 내가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을 체험했던 몇 안되는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 예를 들어 클래식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새롭게 경험하게 해주신 정윤수 선생님, 이슬람 연구의 대가인 이희수 선생님, 인권 및 환경 문제에 관해 여전히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시는 조효제 선생님, 문화 예술 교육과 문화 기획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신 최혜자 선생님, 젓갈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논문을 썼다는 이야기로 충격을 주었으며, 여전히 가장 아픈 이들의 편에 서서 상담과 연구를 지속하고 계신 질적연구의 전문가 황순찬 선생님 등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지적인 행복감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 같다.
그뿐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비슷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을 만나면서 사고의 폭이 좁아졌던 나에게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계신 동료 대학원 선생님들을 만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초등, 중등, 보건, 대안학교, 교회 심지어는 지방자치단체 등등 여러 형태의 교육 공간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 특히 화요주 선생님들 - 좁아터진 학교라는 공간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구, 당진, 전주 등등 전국 각지에서 수업을 들으러 올라오신 문화 대학원 선생님들을 보면서 고작 45만원 내고 버스로 20분 거리에서 통학하는 나로서는 차마 힘들다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또한 이런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교사라고는 나밖에 없었던 '질적 연구' 수업에서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계신 다른 선생님들의 현장 경험을 들으면서 학교라는 공간과 관계에 대한 나의 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대학원 졸업시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대학원 수업을 마치게 되면서, 가장 뿌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한 것이 남은 교직 생활을 이끌어갈 새로운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다니기 전 한동안 교직 생활이 정체되어 있다는 답답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앞서 말했던 그 20대 중후반의 대학원 언저리의 다양한 지적 경험들과 30대 초반 교직 생활 초창기의 열정 충만했던 교직 경험들이 지금까지의 학교 생활을 지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는데, 그 자양분이 다 고갈되고 심지어 낡은 것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때의 고민을 이어 가며, 그리고 새로운 영역에 대한 고민을 열어 가는 2년 간의 지적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을 마련해 준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대학원 홍보 자료에 쓸 법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 요즘 학교에서 하는 일이 홍보 업무라 그럴 지도 모른다 - 아무튼 2년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활력있게 교직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다. 대학원 졸업 시험이 좋은 결과로 마치기를 기원하며, 2년 간의 행복했던 기억을 이제는 일단락하려 한다. 좁았지만 넓었던 성공회대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