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씨의 대학원 레포트 (4) - 정의란 무엇인가 4,5장 비판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의 4장은 대리인 고용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모병제의 문제와 대리모 출산의 문제를 통해 공리주의적 관점은 한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파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징병제를 전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모병제와 관련된 논의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부분이다. 센델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센델은 여러 가지 논변을 앞세워서 모병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는 상황적 압력 속에서 군 복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대리복무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모병제는 공정하거나 자유롭지 않고,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 해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보면 ‘징병제’야말로 공동체의 도덕을 발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군대라는 공간이 출신과 학력 등의 주어진 조건과 상관없이 국가를 이루는 공동체원들과 평등하게 의무를 수행하면서, 공동체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징병제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히 접근할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계급적 질서를 강조하는 내부의 강압적인 분위기나 남성에게만 부여되어 있는 의무로 인해 역차별의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 대립의 문제까지 다양한 입장의 문제들이 착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징병제가 모병제보다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군대 복무라는 행위 자체가 단순히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국가의 강압적 폭력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게 하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치 행위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이런 의문들이 남는 논변이었다.
5장에 이르러 센델이 칸트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제시한 ‘거짓말’과 관련된 논변은 더욱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센델은 칸트의 논리에 대한 변론을 이끌어 가는 자리에서 ‘진실이지만 상대를 오도할 말’과 ‘명백한 거짓말’을 구분하면서, 전자가 나름의 도덕적 존중을 함축하고 있다는 기괴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을 수임하고 있는 로펌의 변호사들이 기묘한 말장난으로 시간을 끌고, 정당한 절차를 방해하는 행위들이야말로 법체계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논리와도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과연 ‘진실이지만 상대를 오도할 말’이 칸트가 말한 ‘정언 명령’에 일치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윤리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그 어렵다는 칸트의 이론을 개략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논점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아쉬움을 넘어 비루함마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칸트의 윤리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결합시켜, 이른바 ‘거짓말할 권리’에 대한 논변을 집중적으로 탐색한 알렌카 주판치치의 의견(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역, 『실재의 윤리-칸트와 라캉』, 도서출판 b, pp.75~104.)을 참고하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주판치치는 칸트와 뱅자맹 콩스탕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살피면서, 이 논쟁이 담고 있는 윤리적 문제들을 칸트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다. 콩스탕은 칸트에 의견을 적극 비판하면서, ‘중간 원칙’(middle principl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의무다. 의무 개념은 권리 개념과 뗄 수 없는 것이다. 의무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다. 어떠한 권리도 없는 곳에 어떠한 의무도 없다. 그리하여 진리를 말하는 것은 의무이지만, 진리를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과 관련해서만 의무다. 하지만 아무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진리에 대한 권리를 갖지 않는다. (앞의 책, p.80.)
일단 우리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 콩스탕의 말은 상당히 수긍이 간다. 나의 말로 인해 친구가 죽을 수도 있다면, 나에게 친구를 해칠 권리가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칸트는 거짓말과 관련된 상황을 두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면서 반론을 전개한다. 첫 번째는 거짓말이라는 그 개념과 이로부터 뒤따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우선 칸트는 진리는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직(진리를 말하려는 의도, 의지)을 진술의 진리(혹은 허위)와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우리의 진술과 믿음의 일치에 관한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우리의 진술과 그 진술이 지칭하는 ‘사실들’의 관계에 강조점이 있다.
(앞의 책, p.82.)
이 말을 부연하자면 친구가 방금 집으로 뛰어 들어간 사실을 내가 보았고, 믿는다고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정직의 영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술의 진리의 측면에서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내가 솔직하게 말할 것을 알고 친구가 집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있었다면, 나는 정직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진리를 말한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더 큰 비극을 야기할 수도 있다. 도망가던 친구가 내 거짓말 때문에 살인자에게 발각되어 죽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는 현행 법에서 ‘강한 개연성’과 ‘약한 개연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분하고 있기에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칸트가 두 번째로 제기하는 이유는 법 철학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칸트는 법이라는 것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합의한 진지한 계약이며, 이 진지한 계약은 여타의 모든 의무와 법적 권리를 위한 기초로서 이바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직과 거짓말의 문제는 이런 사회법률적 맥락에서 상당한 무게를 가진다. ‘살인자의 준칙은 생명의 법적 안전을 파괴하는 반면, 거짓말쟁이의 준칙은 한발 더 나아간다. 그것은 (생명의 안전이건 어떤 다른 것의 안전이건 간에) 가능한 어떠한 안전에 대해서도 적법한 – 즉, 법의 – 요구라는 성격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도 나름의 모순이 있다. 법이 있는 전적인 이유는 우리가 타인들의 정직에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법이 존재하는 이상 거짓말은 단지 법적 규범들에 대한 다수의 가능한 위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며, 법의 바로 그 가능성을 침식하고 그리하여 살인보다 더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어떤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칸트의 이 비인간적인 논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상황을 조금만 다르게 살펴보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페놀을 방류하고 있으며, 이를 고발할 경우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결국 회사를 고발하는 정의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실제로 일본의 미나마타병 사례에서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난 바 있는데,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회사에 속해 있는 이상 회사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의무다. 또 만약 진실을 공개한다면 그들은 해고되고 가족은 길거리를 헤매게 된다. 세상은 일시적으로 그의 정의심과 용기를 칭송하겠지만 곧 잊어버린다. 또한 다른 회사도 그들을 채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한 것처럼 ‘세계시민’으로 행동하면 대부분의 경우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 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에 반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역, 『윤리 21』, 사회평론, p.96.)
이처럼 ‘거짓말쟁이의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선 공동체 윤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라캉은 ‘나의 의무와 타자의 선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 그리고 내가 내 의무를 오로지 내 동포에게 해가 되는 방식으로만 완수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 편에 나의 의무가 있고 다른 편에 내 동포의 선이 있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후자는 의무의 이행에 대한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게 된다.
1) 우리가 타인의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한 타인 자신의 판단에서도 그와 같은 것으로 기능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 타인에게 그/그녀의 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부과하려고 하는 것인가?
2) 고려해야 할 ‘이웃’이라는 것도 상이하게 여럿이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는 이 문제를 좀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공동체의 법으로 규정한 왕의 명령을 부정하고, 자신의 윤리에 따라 오빠를 묻어주려는 행위를 실천한 ‘안티고네’는 칸트적 의미의 진실 전달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주판치치는 이 부분에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살인자를 만났을 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반드시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만약에 ‘칸트가 정언 명령에 의해서 진실을 말하라고 했으니, 나는 진실을 말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정당한 윤리적 주체의 자세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무를 ‘기성의ready-made’ 것으로, 즉 우리가 상황에 연루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태도는 자신의 의무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판치치는 자신의 논의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짓고 있다.
윤리적 주체는 자신의 모든 주체적 수하물을 어떤 주어진 (도덕적) 상황으로 가져와서 그것이 일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주체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태어나는, 오로지 그 상황으로부터만 출현하는 주체이다. 윤리적 주체는 보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돌아오고 그것의 규정을 성취하는 지점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앞의 책,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