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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간지는 세기말 서울에 있었다.

<태양은 없다, 1999>

1


 세계 어디를 찾아 보아도 우리나라만큼 빠르게 성장한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후 폐허가 된 땅에서, 격동의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한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왔다. 그 누가 이 땅에 이런 나라가 설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이렇게 성장을 이룩하기까지 희생해야만 했던 수많은 것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가치 수호와 부패 척결 등에 실패한 후폭풍은 이제 와서 우리에게 깊숙히 품고 있던 독을 뿜어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한 인프라를 잔뜩 즐기다보면 이 나라에 태어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괜히 애국심이 차오른다. 당장 유럽이나 일본에만 가도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인프라를 가진 나라가 많이 없는걸. 그런 맥락에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드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난 항상 찬성 측에 서곤 한다. 


 유럽의 영화를 보면, 특히 서유럽 쪽 국가들은 10년 전의 영화나, 20년 전의 영화를 봐도 최근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도시의 오래된 건물들을 부수고 다시 짓는 걸 금지하고, 역사적인 가치를 존중해서 아직도 백 년 넘은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그들과 우리의 가치는 대척점에 서 있다. 고전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옛날처럼 살고자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멀쩡한 건물도 새로 짓고 어떻게든 최신화시키기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어떤 쪽이 더 나을까? 취향 차이로 갈리겠지만 나는 그래도 최첨단을 달리는 쪽이 더 편리하고 좋다.


 빠르게 흘러간 변화의 물결은 긴 역사에 여러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최근 다시 유행하고 있다고들 하는 복고 열풍에 힘입어 고작 몇 십년 전의 한국의 생활상을 다시 들여다 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고작 십, 이십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정말 같은 나라를 살던 사람들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이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르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말투까지도 같은 언어가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어색해서, '이렇게 하면 기분이 조크든요.' 따위의, 이른바 '서울 사투리'로 말하는 그들을 보면 다른 나라를 보는 게 아닐까 싶다. 가장 멋있게 꾸몄다고 자부하는 요즈음 아이들을 보는 것보다 대충 걸치고 나온 듯한 그들의 모습이 더 '힙'해 보이는 건 그냥 내가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서일까? 어떻게 그들이 일구어낸 사회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사유와, 윗세대들이 지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과 같은 초기 영화들이 지금에 와서는 영화보다는 그 시절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료의 의미로 더 많이 연구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영화는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물론 그 당시 그 곳의 모습을 배경으로 삼고 한다는 조건이 붙고, 이를테면 최근에 개봉한 <1987>은 이러한 사료로 사용되기 애매한 부분도 있고, 모든 영화는 스스로의 배경을 가상의 세계로 설정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그 때의 사람들이 어떻게 영화에 자신들의 모습을 담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도 있다. <태양은 없다>는 1998년 개봉한 영화다. 세기말의 서울의 모습을 꽤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상술한 맥락에서 보아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2


 청년의 숭고한 가치는 꺼지지 않는 엔진처럼 끊임없이 폭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어떤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지 고민하기보다 일단 시동을 걸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항상 새로운 도전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도철과 홍기 또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끝없이 달리고 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도망치기 위해,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때로는 발목을 부여잡는 지독한 삶의 늪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때로는 원하는 것을 두 손으로 쟁취하기 위해 달리는 이들의 모습과, 경쾌한 음악의 조화는 마음을 퍽 들뜨게 만든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명작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 그 전달 방식이 특별하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왔던 이야기들과 크게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만이 가지는 매력은, 익숙한 이야기를 변주하는 데에 있어 세대의 가치를 매력적으로 녹여냈다는 데에 있다. 세기말 서울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마치 2000년이 딱 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가 소멸할 것처럼, 그리고 판도를 완전히 뒤엎을 특이점이 도래하여 모든 새로운 것들이 우리의 삶을 대체할 것처럼, 90년대 말의 사람들은 묘한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이미 지나온 우리가, 사실은 그렇게 변하지 않았고 들떠있던 사회가 다시 가라앉아 보수적인 가치로 되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상당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세기말의 감성과 청년의 폭주하는 기질은 훌륭하게 융합하여 영화의 동력이 된다. 영화의 전반의 흐르는 이런 분위기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영화지만 흡사 <매트릭스>에서 느꼈던 포스트 아포칼립틱한 느낌을 불러올 정도인데, 재밌는 것은 아마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때 그런 느낌을 주려고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닐 것이라는 지점이다. 어떻게든 세련되어 보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녹아드는 화려한 카메라워크나 슬로우 모션의 남발이 아마도 이런 느낌에 영향을 준 것 같은데, 지금 보면 상당히 촌스럽다. 그러나 촌스럽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다시 재발견될 가치가 있다는 뜻이고, 2019년의 내가 보기에는 도리어 유니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래된 것을 다시 찾는 건 항상 이런 재미가 있다.



3


 영화의 갈등을 견인하는 제재는 돈이다. 홍기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여자를 바꾸어 만나며 스스로의 외로움을 채우고자 하고, 언젠가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증거로 남을 건물을 사는 데 자신의 목표를 두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망망대해와도 같은 사회에 혼자 부유하던 그에게 있어, 갑자기 나타난 도철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스스로의 분신이다. 때문에 도철과 관련된 일이면 항상 발을 벗고 나서는데도 불구하고, 돈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그를 배반하고 만다. 그렇게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쉽게 뒤통수칠 정도로 돈이 절박한 이유는, 홍기에게 있어 변제의 의무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물 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큰 빚을 지고 있는 그에게 있어 돈은 욕망의 종착점이자 실존하는 위협이다.


 다른 국가의 영화들에서도 돈은 항상 중요한 제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돈이라는 가치는 또다른 위상을 가진다. 으레 다른 국가의 영화들에서 돈에 목을 매는 인물은, 돈이 아닌 또 다른 것에 위협을 받고 있고, 그 수단으로써 돈을 이용할 뿐이다. 예를 들자면 가족이 아프다거나, 큰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다. 때문에 외화에서 돈에 집착하는 이들이 나오면, 관객은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인물은 다르다. 누군가 빚이 많아서 돈을 갚아야 한다고 하면, 그 이유가 어떻게 되었는지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연설명이 따르지 않아도 관객은 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빚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도리어 빚이 없는 사람을 발견하면 신기할 정도이고, 빚이 없는 것만으로 금수저라 불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얼추 그렇게 부르면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한국의 중산층은 과연 실존하는가. 어쩌면 유니콘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규정하는 한국인은 굉장히 드물다. 하층민과 상류층으로 나뉘는 이런 사회구조는 상당히 기형적이다. 부유한 건 아니지만 적당히 먹고 살 정도는 되고, 특별히 돈에 있어서 부담을 갖지 않고 가끔 무리해서 원하는 것을 사기도 하는 미국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보고, 미국인들은 평범하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부럽다고 느낀다. 고속성장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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