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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덮을수록 뜨겁게 타오르는 불.

<레토(Leto),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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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모든 예술과 같이 형식에 구애받지 아니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물질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을 주워담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데에 그치는 것으로 영상을 활용한다면 영화는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다. 소설가는 글로, 음악가는 소리로, 화가는 그림으로 자신의 열정과 영감을 표현해냈다면, 그 모든 것을 합쳐서 꿈틀대는 가장 자유롭고 확장성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영화 감독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제약이 많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론적으로 보아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영감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일테다. 


 그러니 전기 영화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영화가 단순히 조명하고자 하는 인물의 삶에 대해서 다루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조금 더 자유롭게 자신이 느낀 '그 인물'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든 내가 느낀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하는 이런 고민에서 <레토>는 출발한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락커 '빅토르 최'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전기 영화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으레 다른 전기 영화가 가지는 가치와는 전혀 상반된 것들을 다루고 있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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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전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감독 자신의 색이 너무 진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우리를 감동시켰던 많은 전기 영화에 대해서 기억해보자. <다키스트 아워>의 게리 올드만은 과연 그 배우의 특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를 숨기고 윈스턴 처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스크린 위에 부활시키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 작품으로 예를 들자면, (물론 이 영화가 이룬 전기적 가치에 대해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멜렉은 프레디 머큐리가 이루어낸 성취를 한 발자국씩 그대로 따라가기라도 하겠다는 듯, 마지막 라이브 에이드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까지 완벽히 구현해내고자 한다. 이처럼 배우들의 영역이 아닐지라도, 감독 또한 전기 영화를 만들 때에는 어떻게든 그 인물을 스크린 위에 부활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의 색이 드러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레토>의 '빅토르 최'인 유태오가 그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는가. 부슬부슬하고 길쭉하게 자란 머리 이외에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의 배우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더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것만 같다. 또한 유태오가 아니더라도 이게 과연 전기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할 정도로, 단지 실존했던 인물을 제재로 한다는 것 이외에는, 그들의 행적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대놓고 '이런 일은 일어난 적 없음.'이라며 온전히 감독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장면을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를 전기 영화라고 부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좀 그러면 어떤가. 전기 영화든 무슨 영화든 간에 어떤 장르에 충실하다는 것은 진부하다는 말과 동일시된다.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서 해내고, 그 결과물이 즐기기에 충분히 아름답다면야 영화가 뻗어나갈 수 있는 장르의 가지는 당연히 무한하다. '빅토르 최'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기 원했다면, 이 영화는 당신에게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물에 대해서 들어보았는가 묻는 것이 먼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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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처나 공드리는 영화 감독 이전에 뮤직 비디오나 광고를 연출했던 경력이 있다. <레토>를 연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또한 그런 비슷한 커리어를 쌓은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라고 부르기엔 너무 자유롭고, '힙'하다. 스크린을 자유자재로 나누어 가운데에는 영상이 흐르고, 가장자리에는 뮤직 비디오처럼 랜덤한 영상이 떠다니는 것은 다른 영화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다. 영화가 어떤 인간의 삶을 일정 부분 도려내어 재생시키는 데 그 가치를 둔다면 지금 흐르고 있는 영상이 최대한 현실 세계의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영상이라는 데에서 착안한다면,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감성을 전달하기 위해 얼마든지 화면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이런 방법은 주로 뮤직비디오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레토>의 중간중간 등장하는 뮤직 클립들은 어떤 편집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잘라서 뮤직 비디오로 사용해도 될 정도다. 그러니까 사실은 영화에 뮤직 비디오를 삽입했다고 보아도 전혀 무방하다. 그렇게 해도 앞뒤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오히려 영화의 핵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음악 영화라면 훌륭한 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대전제를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집약시킨 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빅토르 최를 스크린 위로 다시 데려온 이유는 그 인물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데 있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는 청춘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화신으로써 그를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 청춘을 삶으로 구현한 그의 모습, 그러나 단순히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통해서 자신의 이상을 스크린 위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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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나 중국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하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공산주의의 악몽이 시작된 곳은 러시아다. 하지만 너무 폐쇄적인 탓에 오히려 그들의 모습이 대중에 잘 드러나지 않아서인지, 구 동독 따위의 공산주의 국가가 국민들을 탄압하는 모습은 익숙하지만 러시아의 그런 모습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아마 친미적인 문화권에 속해있는 나머지 러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조금 껄끄러움이 있어서 자주 접하지 못해서일까? 어쨌든 나에게 있어 러시아는 국가 자체로 미국과 대립하는 이미지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에도 당연히 모든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존재했을테다.


 가둘수록 뛰쳐나가고 싶어지는 것은 청춘의 증명과도 같다. 끓어오르는 모든 에너지를 분출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락 클럽에서는 락앤롤조차 국가가 허락한 방식으로 조용히 오와 열을 맞춰 앉은 채, 하트를 그린 종이 한 장 하늘 위로 쳐들지 못한 채 박수를 짝짝 치며 감상해야 하지만, 그렇게 소비하기에 락앤롤은 너무 청춘과 맞닿아 있다. 가사를 조금 수정하면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게 해준다고 하자, 그럼 됐네요,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드는 빅토르 최의 모습은 그러므로 청춘의 화신이 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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