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정 한 Oct 27. 2023

회사는 망해도 인생은 진행형

EP2.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너 :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 : 네

너:  얼마나 좋아합니까?

나: 내 자식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너 : 자식 낳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나 : 헉...!! 그건 그렇다.. 


나는 방송국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듀서다. 학창 시절 희망 직업란에는 언제나 방송국 PD를 써냈다. 다른 직업은 꿈꿔본 적이... 정말로 없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도 관련 공부를 하였고, 20대부터 지금까지 한 우물만 오지게 팠다. 매번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들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울고 웃고 사랑했다. 방송국 PD의 일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다. 세상에 돈 받고 하는 일 중에 만만한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3D 중의 3D이고, 두뇌도 풀가동, 센스도 만렙 갖춰져 있어야 피곤한 일이 덜 생기는 직업이다. 능숙해지기 전에는 잘하기 힘든 직업이기에 숙련 기간 동안 설움도 많다. 그럼에도 "다 덤벼" 하는 마음으로 갖가지 장애물들을 극복해 내고 말리라, 마음먹게 되는 것은 프로그램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의 뿌듯함과 만족감 때문이다. 내 안에 가용 가능한 크리에이티브한 요소들을 다 쏟아부어 만든 콘텐츠는 그 시기, 나의 시선과 사고가 오롯이 담긴 결과물이다. 프로그램들은, PD에게 또 다른 나, 분신과 같은 존재다. 


나는 아무리 아니라 해도, 주변인들이 내게 '워커 홀릭'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나는 일을 참 좋아하긴 한다. 일 욕심 많고 제안이 들어오면 거절하는 법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 일은 이런 이유로 재밌고 저 일은 저런 이유로 재밌다. 프로듀서의 일이란 게 매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을 때마다 뉴 챌린지를 경험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매번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공부가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업무 특성에 스트레스를 받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편이라 무탈하게 지금까지 필드에서 직업인으로 일할 수 있었겠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는 회사의 사정이 점점 어려워짐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지금 만드는 프로그램들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만나게 된 나의 첫 음악 프로그램이 예산 문제로 주 1회 편성에서 시즌제로 바뀌었을 때, 그마저도 애매하게 시즌1-11회로 끝났을 때 나는 집에서 본방송을 보며 대성통곡했다.  


너는 나의 베이비야.. 내가 널 꼭 되찾아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흑흑 흑흑 꺽꺽꺽


2020년 '힐링스테이지 그대에게 시즌1'의 무대. 마지막 녹화 날 세트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오기가 생겨, 난생처음 해보는 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여기저기 기관에서 제작지원을 받아서 시즌2를 4개월 만에 론칭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고난은 극복가능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성장 드라마를 더 이상 보지도 믿지도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내 안에 작은 낭만성은 남아 있어서 노오오력하면 안 되는 것은 없다고 배운 대로 따랐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시즌2도 11편의 에피소드를 힘들게 힘들게 제작하며 한 해를 마무리 지었다. 한데.. 첫해, 두 해가 지나 그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고난은 더 강해지며, 곳간은 점점 비어갔다. 그리고 2023년 올해 어느 순간을 지나며 이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흐름이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2021년 '힐링스테이지 그대에게 시즌2' 무대. 이곳에서 국내 정상급 레전드 뮤지션들의 공연이 열렸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정말 "마이 베이비"라고 칭할 만큼 사랑하고 있기에 스스로 제작비를 구해가며 연장에 연장을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는 한 명의 방송 PD로 능숙하고 원숙하게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스킬과 노하우를 내 것으로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편집실에서 편집만 아는 바보가 되었을 것이며, 콘텐츠 비즈니스의 도전 영역을 스스로 점점 확장시켜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일의 분야를 점차 확장시켜 나가야만, 내가 닿을 수 있는 또 다른 지점들이 눈에 보인다. 고생 끝에 낙, 까지는 아니고, 고생 끝에 레벨 업 되는 정도는 얻어낸 것이리라.

결론은, 감사하다-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인생의 새로운 시즌을 발견할 수도, 당도할 수도 없다. 
좋아하는 일을 15년 넘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존버하려면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하는 '너'를 만나야 하는 것 진리다. 











작가의 이전글 회사는 망해도, 인생은 진행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