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철군하면서 조선에서 6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끌고 가 전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포상으로 나눠주었다. 피로인(被擄人)이라 불리던 그들은 대부분 노비가 되어 갖은 천대를 받으며 힘들게 살았다. 특히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은 노리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산 사람이 많았다. 반면 청나라 장수들의 첩이 된 기생들은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조선에서 끌려온 선비들을 벌레 보듯 대했다. 조선에서는 자기들을 희롱하던 양반들이 청나라에 끌려와서는 그녀들 발아래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역겨웠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애걸하는 양반들에게 일부러 더 큰 수모를 안겨주기도 했다. 월선도 그런 기생의 하나였다. 효생과 막돌은 월선의 종이었는데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했지만, 속으로는 기생 마님이라 부르며 무시했었다.
월선은 효생에게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쟁을 얘기하며 조선으로 돌아가면 더 큰 고초를 겪게 될 터이니 가지 말라고 했다. 문묘종사 논쟁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635년 5월에 송시형 등 유생 270명이 서인계 정치인들과 손잡고 율우(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를 문묘(공자를 모시는 사당, 지금의 성균관대 명륜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벌어진 논쟁이다. 인조는 이 상소에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남인계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는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이는 젊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적이 있어서 흠이 있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임금을 모시지 않았으므로 문묘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인조는 이에 대해서도 답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조선이 문묘 종사 논쟁으로 여념이 없을 때 후금의 홍타이지는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명나라 침공을 준비하며 조선도 전쟁 물자를 바치라고 압박해왔다. 주변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조선 사대부들은 이이와 성혼을 공자 문묘에 모시는 문제를 두고 사생결단하듯 다투기만 할 뿐 국방에는 소홀했다.
“황제 즉위식에 갔던 사신들이 다른 나라 사신들은 다 엎드려 절하는데도 꼿꼿이 서 있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잖아요. 오랑캐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어 그랬다는데 물리칠 방도도 없으면서 그랬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요. 아무 대책도 없이 말로만 오랑캐, 오랑캐 하던 사람들이 이 나라의 대신이고 청나라에 간 사신이었다니….”
막돌이 그때를 생각하며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효생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게요. 피로인들은 그런 한심한 대감들 때문에 끌려왔다며 모두 분개했잖아요. 난리가 나기 직전까지도 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기는커녕 명분 싸움에만 매달리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청나라에 그렇게 당하고도 지금 하는 짓들 좀 보세요. 복수하든 아니면 다시는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대비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문묘 종사를 다툴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게 뭐가 있나요? 기생 마님이 그러데요. 평소에는 선비입네 하며 고매한 척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술판을 엎어버리는 등 시정잡배와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 이 나라 양반이라고.”
효생의 말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겪은 마음고생이 작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효생이 먼 하늘을 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어느 날 기생집에 성균관 유생들이 몰려와서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문묘 종사 얘기를 하더래요. 처음에는 가볍게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술에 취하자 말들이 거칠어지고 욕설이 나오더니 멱살잡이를 하고 주먹질까지 하더랍니다.”
효생의 말에 막돌도 맞장구쳤다.
“그 얘기는 나도 기생 마님에게서 들었어요. 평소에는 말끝마다 성현의 도, 성현의 도하던 유생들도 취하니까 하는 짓이 무뢰배와 다를 게 없었다면서요.”
“그러니까요.”
효생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더니 표정 없이 먼 산을 바라봤다. 이러다간 정말 묵던으로 돌아가자고 할 것 같아 막돌은 지게를 지며 효생에게 말했다.
“아씨, 그만 내려가요.”
효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돌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