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효종입니다.”
“들어오게.”
효종은 분가해서 따로 사는 효생의 막내 오빠다. 효생이 때문에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문안 인사를 자주 오는 자식이었다. 마님은 여러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과 가장 편하게 이야기를 했다. 다른 아들들은 대감을 닮아서 고집스럽기도 하고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데 막내는 달랐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인들을 오랑캐 놈들이 가만히 뒀을 리가 없으니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돌아온 여자들이 정절을 지켰다고 보기엔 어렵지 않겠습니까? 특히 효생이처럼 예쁜 여자들은 더욱 그랬겠지요. 당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그런 여자를 용서할 남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절이 그러하니 이제 어머니도 마음을 정리하시지요.”
“남자들이 제 역할만 했어도 이런 수모를 겪었겠니?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인데 뒤늦게 후회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너도 사내라고 남자 편만 드는구나. 하지만 나는 결백하다는 효생의 말을 믿는다.”
“설사 효생이 결백하다고 해도 조선 땅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명을 내렸어도 예조판서 장유 대감은 며느리가 오랑캐에게 잡혀갔다가 절개를 잃고 돌아왔다며 아들이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면서요.”
“그 소문은 나도 들었다. 하지만 승지 한이겸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딸이 사위로부터 이혼당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지 않느냐.”
“딸 가진 부모니까요.”
“우리 처지가 한 승지와 다른 게 뭐란 말이냐? 더구나 효생인 정조를 잃지 않았다고 저렇게 항변하는데….”
어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상황은 효생에게 너무 불리했다. 문안을 마친 효종은 효생에게 갔다. 그녀의 방은 대감의 엄명으로 수발드는 여종 한 명을 제외하고는 드나드는 사람도 없어 썰렁했다. 그런데다 며칠째 곡기를 끊고 누워만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효생은 효종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힘겹게 벽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지난 며칠 동안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어야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리겠지요? 그렇죠? 정절을 지키지 못해 자진했다고 하면 나라에서 정려문(旌閭門)을 세워주고, 오라버니들의 출셋길도 활짝 열릴 테니까요.”
갑작스러운 효생의 말에 효종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동생 목숨값으로 출셋길을 마련할 수야 없지 않은가? 효생은 새삼 설움이 밀려오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효종은 가련한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한스러웠다. 한참을 흐느끼고 난 효생이 월선이라는 기생 이야기를 꺼냈다.
“묵던에 있을 때 월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이 내 주인으로 있었어요. 막돌 오라버니와 나는 그녀를 기생 마님이라고 불렀는데 그 마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고마운 사람이구나. 그런데 월선이 네게 잘해 준 이유가 뭐지?”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호란이 나기 전, 월선이 일하던 기방에 놀러 온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모시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주장만 펴던 유생들은 술이 거나해지면서 말이 거칠어지더니 급기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싸움을 말리려고 끼어든 기생이 있었다. 그러자 일부 유생들이 건방지게 양반들 얘기하는데 끼어든다며 마구 때렸다. 이때 기생에게 주먹질하는 유생들을 가로막고 그녀를 보호해 준 유생이 있었다. 효생의 말을 듣던 효종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는지 말을 흐렸다.
“나도 기방에 간 적이 있다만….”
“그래요. 오라버니가 보호해 준 기생이 바로 월선이에요. 그날 오라버니 아니었으면 큰 낭패를 당했을 거라며 무척 고마워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오라버니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곁에 있게 해줬고, 막돌 오라버니에게 나를 지키라고 했어요. 막돌 오라버니는 그때부터 내 주변을 떠나지 않고 힘든 일이 생기면 도와주고, 나를 집적거리는 사내들이 있으면 혼내주었어요.”
효종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록 한 번뿐이었지만 공부해야 할 나이에 기생집을 출입했다는 게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효생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억나지도 않는 월선이라는 기생이나 막돌도 효생을 지켜주었는데 가족인 자기는 몰라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책감도 들었다. 오히려 효생이 자진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묵던을 떠나기 며칠 전에 마님이 한양으로 돌아가지 말고 묵던에서 같이 살자더군요. 묵던으로 끌려온 여자들은 한양으로 돌아가서 더 큰 고초를 겪더라며 마님과 종이 아니고 언니와 동생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했어요.”
“월선이 그런 말을 했다고? 음….”
효생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막돌 오라버니, 아니 막돌이 무사한지 궁금해요. 그러니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알았다. 막돌을 볼 수 있게 해주마. 하지만 지금 네 몰골로는 안 되니 몸부터 먼저 추슬러라.”
효생의 방을 나선 효종은 행랑채로 나가 막돌을 찾았다.
(계속)
(진주남강문단 21호,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