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서울을 떠난 버스는 맑은 햇살을 이고 제천을 향해 달렸다. 이름만 들어도 청량한 ‘호반의 도시’, 제천으로 떠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월간 수필 문학’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함께하는 가을 문학기행이다. 버스 안에서는 반가운 얼굴을 마주한 동인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최근 발표한 작품 이야기가 오갔다. 한 권의 잡지로 시작된 인연이 세월 속에서 이렇게 단단해졌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글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이 다시 글로 이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제천. 서울, 대구와 더불어 3대 약령시장으로 꼽히는 도시다. 이름에 걸맞게 제천은 청명한 바람 속에 가을 냄새와 약초 냄새를 함께 담아 우리를 맞이했다. 첫 번째 일정은 의림지 산책이었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의림지는 잔잔한 수면 위로 하늘을 비추며 고요한 시간을 품고 있었다. 수면에 비친 구름은 천천히 흘렀고, 나무 가지가 물결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선배가 말했다. ‘글도 저 의림지 같아야 해. 겉으로는 잔잔해 보여도, 그 안에는 깊은 물이 흐르고 있지.’ 그 말이 가슴에 닿았다. 내면의 깊이를 채우지 못한 글은 잠시 빛나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이 고요한 호수 앞에서 새삼 깨달았다. 의림지는 글을 쓰면서 문장의 표면만 다듬은 것은 아니었는지 살펴보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회장의 수필 작법 특강이 있었다. 회장이 인용한 윤오영 수필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안개같이 시작해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글은 가장 높은 글이요, 기발한 서두로 시작해서 거침없이 나가는 글은 재치 있는 글이요, 간명하게 쓰되 정서의 함축이 있으면 좋은 글이다.’ 회장이나 윤오영 선생은 ‘좋은 수필은 잘 쓴 문장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삶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작은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 그것이 수필의 본질이라면 나는 얼마나 본질에 충실했을까? 아니, 독자의 눈을 의식하며 멋을 부리거나 감정을 과장하는 잔재주나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강연이 끝난 뒤 청풍호 유람선을 탔다. 잔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위에서, 입담 좋은 선장의 재치 넘치는 설명을 들으며 시나브로 변하는 풍경을 감상했다. 햇살이 호수 위에서 반짝이며 금빛 파문을 일으켰다. 한 폭의 산수화처럼 호수를 둘러싼 산들을 망연히 바라보다 ‘글을 쓴다는 건 무작정 떠난 여행과 닮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거친 바람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한 물결 위에서 스스로 비춰보기도 하지만, 그 행로의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나를 만나는 기쁨이 있으니까.
제천의 풍경이 보여준 진실은 단순했다. 아름다움은 꾸미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가장 깊이 마음을 울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호수를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 호수의 물결이 고요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또렷이 마주하게 된다. 제천의 가을은 그렇게 내 안의 호수를 비춰주었다. 오늘의 바람과 빛을 꾸밈없이, 그러나 진실하게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