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말에서 6월초께였을 게다. 베를린 포츠다머플라츠의 한국문화원에 취재차 들렸다가 인근 카페에서 일을 하던 중 주독 북한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계획에 없었다. 충동적으로 무턱대고 전화했다.
구글맵에 나와있는 대표 번호를 눌렀다.
당시 북한 외교관이 전화를 받았다. 내가 누군지 두어 문장 정도 설명하는데, 돌아온 대답이 "용건만 말하라우".
바로 용건을 말했다.
그해 가을 학술연구차 북한에 방문할 예정인 베를린자유대 이은정 교수님 팀을 따라 북한으로 동행취재를 계획하고 있었다.
베를린자유대 측에서 북한대사관으로 동행취재를 문의했으나 답이 오지 않던 시점이었다.
그 전해까지만해도 경색돼 있던 남북관계는 그해 봄 판문점에서의 1.2차 정상회담과 6월 북미정상회담으로 순풍을 타던 시점이었다.
베를린에서 북한으로 취재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판단했다. 가을께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으로 갈듯해보였다.
욕심이 났다. 북한에서 취재해보고 싶었다. 그전에 북한 방문은 이명박 정부 초기 정치인들을 따라 개성공단에 가본 게 전부였다.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기자들의 북한 취재길은 막혔다.
남에서 기자들이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가기 전 베를린에서 먼저 북으로 들어갈 수 있을 듯도 싶었다.
북한 외교관은 나의 용건, 방북 취재 요청을 듣고는 알겠다고만 했다. 의례적 답변이었다. 학술팀 동행 취재라 북한에서 제약이 많이 따랐겠지만, 김일성대 총장만 인터뷰 해도 큰 성과라고 생각했다.
썰렁한 통화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남영 주독 북한대사가 베를린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성명 기념행사장에 나타났다. 북한 청소년 합창단을 동행했다. 박 대사는 축사도 했다.
행사가 끝나고 박 대사가 담배 피우러 나가는 것을 보고선 뒤따라 갔다. 박 대사에게 직접 방북 취재 요청을 했다. 박 대사는 웃기만 했다
이후 베를린자유대로도 동행 방북 취재에 대한 북측의 'ok' 사인은 오지 않았다. 북한 방문 취재는 좌절됐다.
그해 10월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에서 정자 상량식이 있었다. 박남영 대사도 참석했다. 행사가 끝난 뒤 차로 향하는 박 대사 일행을 따라갔다.
"다음에 기회되면 북조선에 좀 보내주십시오."
박 대사는 같이 온 외교관에게 "저번에 못갔나?"라고 능청스럽게 물어봤다. 다 알면서 말이다.
멀어저 가는 박 대사 일행에게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다른 특파원도 함께해서 (북한)대사관에서 족구 한 번 하시죠. 기사는 물론 안쓰고 오프로 하겠습니다."
박 대사는 돌아보며 역시 미소만 지었다.
그해 12월, 베를린에서 열린 핸드볼남자세계선수권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참석했다. 그때 훈련장에 남북 대사가 함께 찾았다.
박 대사가 차를 타고 가기 전 담배를 피웠다. 취재가 끝난 상황이었고 박 대사에게 다가갔다. 다시 "대사관에서 족구 한번 하시죠."
역시 박 대사는 웃기만하면서 담배를 한대 건넸다. 지난번에도 담배를 줬었는데 피우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박 대사가 불까지 붙여주려고 했다.
'을'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
담배를 끊은지 6∼7년만에 처음으로 담배를 두어모금을 빨았다. 핑 돌았다.
베를린에서 3년 간 끝내 방북 취재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막판에는 남북관계가 다시 냉랭해지고 코로나19 상황으로 북측 인사들을 볼 기회도 없었다.
그래도 앞에 언급한 만남들과 북한 핸드볼 선수들, 베를린자유대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일성대 학생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경험하고 느낀 점들은 꽤 컸다.
남남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북한과 소통하고 나눔을 하는 방법론 및 필요성 등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문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나의 '민족'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전제 아래 '민족'보다 더불어 잘 사는, 공존하는 이웃·형제의 의미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명령 논란을 취재할 때 '과연 북한 대사가 소녀상을 찾았다면 도움이 됐을까'하는 질문도 던져봤다.
'힙베를린, 갈등의 역설' 책에는 이런 문제 의식도 담았다.
북측 핸드볼 선수들과 관련된 이야기, 김일성대 학생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