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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강 Nov 16. 2021

사랑하는 영화에게

영화 <윤희에게>


한국에서 보지 못 했던 영화를 독일에서 봤다. 암막 커튼을 치고 방의 모든 불을 끈 후에, 불행히도 와이파이가 노트북에 연결되지 않아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설원과 여자들과 사랑의 이야기를 지켜봤다.


나도 네 꿈을 꾼다는 김희애 배우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문장과 그 여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불 꺼진 방의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었다. 이 영화는 나를 사랑하는 영화다.




윤희에게,


https://www.youtube.com/watch?v=vP4-JvABTK4




김희애 배우가 연기한 윤희는 한국의 낡은 관습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다. 그는 딸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정상성을 강요하는 가족의 강압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친구 쥰과 헤어졌다. 이후 소개받은 남자와 쫓기듯 결혼했고, 딸을 낳았고, 이혼했다.


윤희의 딸 새봄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일본에서 도착한 편지를 받고, 그 편지의 주인과 윤희가 얽혀있는 과거를 뒤쫓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익숙하지만 유익하진 않은 관계의 종식에서 시작된다.


이혼한 남편은 한때 가족이었던 윤희를 보살피려고 하지만 새로운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는 한 가정의 구성원이었던 세 사람의 관계가 이혼을 뛰어넘어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한다. 건조한 성정의 엄마와 원활히 소통하지 못하던 새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어엿한 성인으로서 윤희의 품을 벗어나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듯 윤희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각자의 길로 나아감에 따라 통제할 수 없는 관계의 변화 속에 놓이게 되는데, 그때 쥰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변화는 인간을 추동한다. 새봄은 그 편지를 읽고 일본 여행을 가자며 윤희를 꼬드기고, 윤희는 어떤 충동에 휩싸여 이를 수락한다. 오래전 끊겨버린 두 사람의 끈은 쥰이 사는 오타루에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타의에 의해 희미해졌던 사랑이 다시 선명해진다.


일본에서 옛사랑을 다시 만난다는 간단한 시놉시스는 김희애 배우의 노련한 연기 덕분에 드넓은 설원처럼 확장될 수 있었다. 그가 연기한 윤희는, 애정(哀情)은 있지만 연정은 없는 남편과 살면서 삶의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혼 후 가장으로서 먹고사는 일에 피로를 느끼고, 말수가 많지 않으며, 몰래 담배를 피우고, 딸에게 살갑게 굴지 않는 엄마.


한국에서 어떤 일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무력한 개인처럼 행동하던 윤희는, 새봄과의 여행을 통해 의욕을 되찾는다. 그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능숙하게 다뤄 딸의 사진을 찍어주고, 홀로 오타루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하루를 채운다. 거기엔 엄마의 자유를 응원하는 새봄의 배려가 있다. 마침내 윤희는 집 앞까지 찾아갔지만 차마 대면하지 못했던 쥰을 갑작스레 마주치고 나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불행을 대면할 용기를 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윤희를 독립적인 여성으로 보려고 애썼다. 어떠한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어떠한 인간으로서, 타의에 내몰려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원치 않게 이별을 경험한 퀴어 여성으로서 그가 가진 입체성을 하나도 허투루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쓰며 내가 자꾸 그를 어머니의 틀 안에 가두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윤희가 엄마라서 담배를 피우는 게 신기하고, 엄마라서 퀴어적 경험이 독특하게 느껴지고, 엄마라서 홀로 외국을 여행하는 게 드문 일처럼 여겨졌다.


누군가의 엄마라는 정체성을 윤희에게서 떼어놓을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든 행동이 엄마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런 일념으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윤희를 분석하려 노력했다.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를 신성화하지 않는 일은 딸에게 이토록이나 어렵다.


윤희를 해체하는 일은 그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윤희와 쥰의 사랑에는 가부장제라는 공통된 장애물이 있었고, 그런 두 사람의 이별과 재회는 동아시아 퀴어 여성의 삶을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사랑을 침몰시켰던 억압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그들을 지켜봤다. 나는 가끔 윤희가 되었고, 가끔 쥰이 되었으며, 또 가끔 새봄이 되었다. 그들을 따라 눈길을 걷고 편지를 썼다. 그들과 사랑을 주고받았다. 영화가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인물들 앞에서 나는 그렇게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윤희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영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감독인 셀린 시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들을 사랑하며 내 인생을 보냈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는 많지만, 나를 사랑하는 영화는 드물다. 덕분에 드문 사랑을 받았다. 다행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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