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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옷 Apr 07. 2019

감흥이 없는 게 아니라 피곤한 거예요

체력과 감흥의 상관관계


감흥을 못 느끼는 게 아니라 피곤한 거예요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한 광고를 보자마자 ‘이건가...?’ 싶었던 게 있었다. 여행을 가도 재미가 없고, 맛있는 걸 먹어도 그냥 그렇고. 그런 내용의 광고였다. 광고 카피가 말했다.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피곤한 거예요.”     


일동제약 아로나민 골드 광고 캡처



  여행을 갈 때 꼭 챙겨야 하는 건 뭘까? 핸드폰, 여권, 카드. 이 세 개만 있으면 어떻게든 다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핸드폰 챙겼어? 여권은? 지갑은?” 하고 세 가지 질문만 체크해도 여행은 그럭저럭 안전하게 끝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여행에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체력이다.


  여행기자로 일할 때, 국장님은 항상 김기자가 체력이 없다고 했지만 내 생각에 난 보통인의 체력이거나 그보다 좋은 것 같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친구들이 그래도 여행기자라고 체력 좋은 거 보라며 놀라기도 하는데, 여행기자를 하기엔 체력이 없는 편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얼마나 체력이 좋아야 빡빡한 일정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거지?) 카메라까지 이고 지고 아침부터 등산이나 트레킹을 가다 보면 여행 시작 땐 분명 몇 분에 한 컷씩 찍혀 있던 사진이 여행 끝 무렵엔 텀이 길어져 10분에 한 컷, 15분에 한 컷, 20분에 한 컷... 이 되어 있다. 그럴 때마다 운동하고 살아야지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불행히도 운동을 시작했어도 내 체력은 그냥 그렇다.


  여행은 정말이지 체력 싸움이다. 내가 특별나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들 동의할 거다. 어릴 때 많이 돌아다녀 보라는 것도 그만큼 체력이 좋으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 똑같이 유럽을 가도, 20대 초반에는 어떻게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야경을 본다고 뽈뽈거리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다가 잠깐 산책하고 돌아와서 누워 있다가 저녁 먹으러 나가볼까... 정도의 느슨한 여행도 이상하게 피곤하다.      


  어떤 여행을 하느냐의 차이도 있지만, 대부분 여행은 걷거나 돌아다니거나 외부 활동이 많으니까 당연히 평소보다 체력을 더 많이 쓰게 되고, 몸은 쉽게 방전된다. 긴 여행이 무조건적으로 좋은가? 그렇지도 않다.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옛날부터 나는 긴 여행을 선호했는데, 여행 기간이 길면 하루에 일정을 하나씩만 잡고 느슨하게 여행해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결국 5-6일이 지나면 어쨌든 체력은 방전 되어 있다. 누적된 피로로 평소 체력의 70% 정도의 체력이 기본 체력이 된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럼 그때부터는 다녀야 할 것의 절반만 다녀도 이미 더 빨리, 더 쉽게 지치게 된다.


  체력이 없다는 건, 뭘 해도 피로하고 짜증만 나게 한다. 같은 거리도 캐리어를 끌고 지났을 때와 숙소에 짐을 다 내려놓고 두 손 두 발 가볍게 지날 때 보이는 게 다르고 흥미를 느끼는 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전에 새벽 6시부터 출발하는 당일 투어를 간 적이 있는데, 너무나 피곤하고 더워서 정말 몇몇 장면(진짜 사진으로만 남은 딱 그 풍경 몇 개)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서 차에선 기절하듯 잠들었고, 가이드가 내리라면 내려서 보라는 걸 봤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감흥이 생겨! 잠도 덜 깼는데. 어디가 어딘지 이름이나 알고 보면 다행이지.


  버스가 여행지 풍경을 감상하는 방법  하나가 되려면, 택시에 비해 불편하고  시간을 앉거나 서서 이동해도 괜찮을 체력이 필요하다. 덜컹덜컹. 시골 시내버스를  시간이 넘게 타는  생각보다 엄청 힘들다.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힘든  크게 느껴지면 당연히 싫은  된다.


  좀 번외의 이야기지만, 나는 여수 향일암을 가는 버스를 꽤 좋아하는데, 옆에 바다를 끼고 향일암까지 가는 버스 풍경은 정말 최고로 손꼽는다. 실제로 예전 후배 기자에게 대중교통을 타고 즐기는 여행 꼭지로 추천을 하기도 했는데 좋다고 말하면서도 ‘선배님,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후기를 전해서 미안한 마음도 좀 들었다.


  그런 거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도 그만큼 걷는 게 재밌을 체력이 없으면 재미없다. 등산의 기쁨? 트레킹 코스를 완주하는 즐거움? 일출을 보며 느끼는 감흥도 모두 마찬가지다. 몽골에서 열두 시간 모래사막을 달려 모래언덕을 걷는 일도 몸이 힘들면 그저 오랜 시간 차에 타서 구겨진 몸만 아프고, 모래언덕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내달려 왔을까 싶고 굳이 저 위에 올라가도 보이는 거라곤 또 모래뿐일 텐데 올라가야 할까...? 싶어 지는 그런 거 말이다. 제주 오름을 끼고 걷는 길? 좋다고 해도 이제 그냥 이 풍경도 다 똑같은 것 같고 뭐가 다른 지도 모르겠고 힘만 들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그런 거랑 똑같다.


  건강한 체력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만큼 요즘 동의하는 말이 없긴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피곤해서 여행의 재미가 점점 사라진다는 게. 사는 건 피곤한 일이고 인생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데 그럼 그냥 모든 게 다 노잼이어야 하나? 하긴. 실제로 나는 요즘 여행이고 뭐고 모든 게 다 노잼이다. 근데 체력도 저질이라 피곤해서 사는 게 그런 건지 여행이 노잼인 건지 분간이 잘 안 된다.


  가끔 선후 관계와 인과 관계 그 모든 것이 헷갈리는데 딱 여행과 피곤, 인생과 체력이 그렇다.


  재미가 없어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도 그저 그 정도의 재미인 게 체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 감흥이 없는 건지. 원래 사는 게 재미없어서 여행도 그런 건지, 체력이 없어서 사는 것도 이렇게 겨우 살아가나 싶은 건지. 이야기하다 보니 뫼비우스의 띠 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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