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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n 05. 2024

고수와 호구

아이들 놀이활동이나 생활지도 할 때 종종 고수, 중수, 하수 얘기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교사들이 사용하는 이야기다. 이미 10여년도 더 전에 학급경영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한 방법이다. 콜버그의 도덕성 단계처럼, 놀이에도 하수와 고수가 있으니 이왕이면 고수가 되지는 취지다.


교실마다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핵심은 같다. 예컨대 내가 이겨야만 즐거우면 하수, 승패와 관계없이 즐기고 배려하면 고수다. 마찬가지로 청소활동 등 생활지도 할 때도 적용할 수 있다. 내 자리만 치우면 하수, 옆자리도 치울줄 알면 고수. 선생님이 지적해야 하면 하수, 말하지 않아도 하면 고수. 이런 식이다. 아직 순수한 중학년 정도 아이들은 뭔지 잘 모르겠으면서도 하수인생을 사는 하수인간보다는 더 그럴듯 해보이고 훌륭하게 느껴지는 고수가 되려고 자세를 고쳐잡는다.


어제 수업을 마무리하고 정리정돈하면서, 고수가 되자는 얘기를 꺼냈다. 이왕이면 내 옆자리나 공용공간도 치우자고. 그랬더니 고학년답게 몇 몇 아이들이 "그럼 나는 하수 할래요.","하수가 낫겠네."라고 말했고 뒤따라 '그러네 하수해야겠네', 하면서 동조하는 아이들이 나왔다. 별다른 대꾸없이 정리를 끝냈다. 그리고 다음 수업 진행 전에 아이들에게 짧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수로 살고 싶으면 하수로 살면 되지. 자기 인생인걸. 남한테 폐끼치지만 않으면 괜찮아. 다만, 고수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가질줄 알면 좋겠다. 고수들 덕분에 한결 나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거니까."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중등, 고등 두 아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도 들지 않고 둘이 번갈아가며 툭툭 말을 던졌다.


"엄마, 그건 고수가 아니라 호구에요. 요즘 애들은 그런 걸 호구라고 불러요."

"엄마가 순수한건 알겠는데, 애들한테도 그러지는 말아요."

"엄마는 너무 이상적이야."


남편도 거들었다.

"그렇게 말하는건 바보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일종의 가스라이팅같이 들린다고. 그냥 하라고 그래."


머릿속에서는 무언가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문이 막혀 말이 나갈 수가 없었다. 마시고있는 맥주 탓이 아니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부정당했는데, 상대가 틀리다고 말하고 싶은데, 무엇이 틀렸다고 설명하지 못하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의도가 전달되지 않았고, 오해를 받았고,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저녁내내 마음 한 구석에서 고수와 하수가 떠돌아 다녔다. 아이들에게 고수와 하수 이야기를 건네며 정말 전하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일까? 학급경영과 생활지도에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 정리하고 싶었다.  애초에 하수와 고수의 구분을 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라고 자극하고, 도덕적 당위를 실천하는데서 얻는 만족이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태도보다 가치있는 것일까? 혹시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드려는 어른의 기만은 아닐까? 나를 의심해야했다.


내가 처음 만든 말은 아니지만, 하수와 고수라는 놀이단계는 수준을 나눠 구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약간의 도전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생활의 달인, 생활의 고수 같은 표현처럼 일종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지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교실 안에 아이들은 모두 다 다른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태도나 놀이활동에 참여하는 태도, 친구들과 관계맺고 생활을 정돈하는 태도면에서 하나로 묶을 수가 없다. 이 중에 무기력한 태도로 참여하지 않거나, 보상만 바라며 분위기를 해치는 아이들, 지나친 승부욕으로 놀이 자체를 엉망으로 만드는 아이들이 많으면 아무리 교육적 의도와 목적이 훌륭하고 잘 조직된 활동이라도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특히 놀이에서 고수와 하수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더 넓은 놀이의 기쁨을 느끼면서 종국에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놀이방법을 안내해주기 위함이다. 법이나 제도처럼 규칙으로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지정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궁극적으로 인식의 변화와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회유책이라고 볼 수 있다. 부정적인 아이들의 태도를 매번 옳고 그름이란 교사의 잣대로 평가하고 돌려세우면 교사는 지치고 아이들은 방어적이 된다. 스스로 공동의 이익과 성취를 위해 태도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주면 서로를 설득할 있다. 이는 아이들의 양심에 기대고 자발성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일 뿐이지 교사의 편의를 위한 조종이 아니다.  


호구에 대해서도 아들과 더 얘기해보고싶다. 착하고 선량한 것, 다정한 태도를 지닌 사람과 만만하게 보이고 이용당하는 호구는 다르다.


이렇게나 길게 변호하고자 하는 것은 고수가 아니라 호구라는 아들의 말이, 사실은 꽤 슬펐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나는 하수인듯하다.  


내가 말한 고수는 이 고수 말고 다른 고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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