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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Nov 16. 2024

드문드문 11월 일기

1. 


열네 살 작은 아들 별명은 '요물'이다. 하도 엄마를 들었다놨다해서 내가 붙였다. 겨우 14년 산 주제에 어찌나 엄마를 심쿵하게 하는지, 매번 돌고래소리 비명을 지르게 한다. 살짝 무심한 모먼트에 다정한 멘트, 얘가 얘가 누굴 닮았나 싶어 한 번더 처다보게 된다. 아빠 피라고는 한 방울도 안 섞인게 분명하다. 아이의 말을 기록해놨으면 좋았을텐데 연구실에서 수다 한 번 풀어버리고 나면 다 잊어버리니 뒤늦게 후회한다. 평생의 즐거움, 혹은 아들의 흑역사로 남겨둘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어제는 같이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내가 맥주를 집으니 지긋이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했다.


"엄마는 살만 빼면 진짜 예쁜데. 엄마 옛날 사진보고 내가 알았잖아."


남편은 나를 멕이는 말이라고 비웃었지만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련다.


"시끄러 살빼면 진짜 이쁘다잖아, 맥주 도로 갖다놔."


맥주 대신 카트를 채운 건 아들의 온갖 간식들이었다. 작은놈은 요물이 맞다. 맨날 엄마가 홀랑 넘어가니까.



2.


50년 인생 처음으로 뮤티컬 티켓을 예매했다. 더 늙기 전에 제대로 몰입하며 공연을 보고 싶은 절박함, 그까짓 돈, 없으면 어떤가 나도 좀 누리고 살고싶다는 중년의 패기가 콜라보하여 충동적으로 질러버렸다. 나 혼자 가도 되지만 운전사가 필요하므로 남편 것까지 예매했고, 그 밤 남편 무릎을 베고 누워 티비를 보면서 예매사실을 통보했다. 남편은 관심없는 배우, 그닥 끌려하지 않는 공연이지만 할 수 없다. 결혼기념일 핑계로 끊었으니 남편도 동행해야한다. 비록 티켓가격을 듣자마자, "그 돈이면 로봇청소기를 사지!!!" 하며 울부짖긴했지만 말이다. 로봇청소기 대신 문화생활을 강제로 선택당했어도 그 이상 불만의 말따위 붙이지 않았다. 고마운 남편.


공연을 사랑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지금껏 경제적인 이유, 시간적인 이유 등으로 제대로 즐긴 적이 손에 꼽는다. 퇴근하고 혜화로 종로로 다니면 주중에도 연극을 보러다니곤했던 20년 전이 마치 전생의 일같다. 연극을 보고, 연주를 듣고, 그림을 보면서 내 안에 깃든 예민함과 섬세함을 생생하게 느끼곤했었다. 그만큼 향기로웠고, 때로 고통스럽기도했다. 그때만큼 열정적으로 누릴 수는 없겠지만 좀 더 여유롭고 깊이있는 시선으로 예술에 빠져들고싶다. 씩씩하게 혼밥하듯이 혼자 관람하고 혼자 향유하는 시간을 만들어보리라.


감동을 기대하고 뒷자리에 붙은 숫자 0의 갯수에 손을 떨어가며 예매한 공연이니만큼 공연날까지 두근거리며 기다리겠지. 이 설레는 마음만큼 만족스러운 시간이 되었으면한다. 차라리 로봇청소기를 샀어야한다고 남편이 아쉬워하는 공연만은 아니길. 부디, 제발. 반드시, 꼭. 


3.


게으른 주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데 큰아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머리 말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아들! 얼른 와서 엄마 좀 안아주고 가라! 엄마 아프다!"하고 외쳤다. 손에 묻은 물을 털며 털레털레 속옷만 입은채로 안방으로 온 순한 아들이 털썩 침대 위에 눕는다. 마냥 좋아서 기침나오던 것도 잊고 웃었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아들이 한 마디 한다. 

"엄마, 눈이 안 보여요. 두부에 칼로 그은 것 같아." 

이 녀석 어디서 그런 기가막힌 표현을 배웠냐. 유튜브에 나오더냐! 했더니 그냥 생각나서 말한거란다. 어디 어떻게 복수를 해주나 머리굴리는데, 엄마를 꼬옥 안아주는 아들 살이 푸둥푸둥하다. 눈을 감고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들, 드라마 보면 남주한테 안긴 여여주들이 가끔 그러더라. 단단한 가슴팍.나 지금 할머니한테 안긴 줄 알았어. 말랑하고 포근한 가슴, 넘 기분좋다." 

나른하게 누워있던 큰아들이 굵은 목소리로 엄마! 하고 외치며 벌떡 일어난다. 

주말 모자간의 피튀기는 복수혈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아, 아직 11월이 마무리 되려면 멀었지만, 살아있다고 그간 써둔 일기라도 모아서브런치를 찾았습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바빴거든요(사실은 게을렀거든요.) 브런치 연재일도 놓치고 독촉하는 알림도 두 번이나 받았는데 이웃작가님들 글도 못 읽고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오늘 좀 정신차리고 하나씩 밀린 일 해결하고 있는 중입니다. 생존신고 하고요, 그간 작가님들이 쓰신 귀한 글들도 차분히 읽겠습니다. 비오는 11월 중순의 토요일이라니. 너무 귀한 날입니다. 평안한 날 되세요. 저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작가님들의 다정한 이웃이고 싶은 피어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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