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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의 맛, 딸기의 맛, 목의 맛

by 피어라

왜냐하면 목이란 무겁고 피로한 기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양한 것을 삼키려면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다른 맛이 나지 않을까 싶고, 무겁고 피로하다면 납,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백의 그림자] 황정은/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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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백의 그림자]를 읽다 저 구절을 발견하곤 순간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루종일 같은 말을 반복해야하고, 근무시간 내내 계속해서 말을 해야하는 사람이다. 직업병처럼 이비인후과를 정기적으로 찾고, 목감기를 피하기 위해 예방접종을 하고, 프로폴리스와 도라지청을 달고 산다. 그러다보니 목이 피로하고 무거운 기관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고, 뒤이은 대사를 통해 언어를 전달하기 위한 목의 의미가 아니라 소화기관이라는 목의 기능에 대한 얘기에 또 놀라며 공감했다. 목에서 납이라는 묵직하고 위험하며 불순한 의미의 금속을 연상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감탄하다 순간 어린 날의 통닭을 떠올랐다.


나 어릴 때, 아직 치킨이 없었을 때, 기름에 젖은 노랑종이봉투에 담겨진 전기구이통닭이 최고였다. 아직 사업이 망하지 않았던 젋은 날의 아버지가 늦은 저녁 사오셨던 통닭은 지금도 기억할 정도로 황홀한 맛이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껍질에 촉촉한 고기의 맛, 짭잘한 소금을 찍어 먹는 통닭은 그야말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되어야 겨우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평소 밥상에선 아무리 우리가 먹고싶은 티를 내도 아빠에게 제일 좋은 찬을 내주시던 엄마도 통닭앞에서 환호하는 어린 짐승들에게는 한 수 접어주셨다. 자그만 두 손에 기름을 잔뜩 묻혀가며 뜯어먹던 어린것들을 엄마아빠가 따스하게 지켜봐주는 풍경이, 아주 가끔은 내게도 있었다.


허나 닭은 한 마리인데 들어갈 입은 셋.(엄마아빠를 제외하고) 자고로 닭이라 하면, 다리도 둘이요 날개도 둘인데 목은 하나라. 어린 세 남매, 부위따위 가리지 않고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바지런히 달려들었을텐데, 셋이서 제일 먼저 달려든 부위는 목이였다. 지금생각하면 어이없는데, 셋 다 살이 많은 가슴살도 아니고 쫄깃한 다리살도 아니라 목을 제일 좋아했다. 살만 발라서 나오는것도 아니고 기다란 목뼈에 살짝 붇은 살을 손에 쥐고 뜯어 먹었는데, 그게 무슨 맛이라고 그리 좋아했을까. 먹어봤자 기름만 뚝뚝 흘러나올텐데 말이다.


그건 아마도 엄마의 한 마디 때문이었을 거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먹기편하고 살많은 부위를 다 내어주고 아무아무도 먼저 먹으려 하지 않는 아이 검지손가락만한 목뼈를 집어 먹는 시늉이나 하셨을테지.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렇게 말하곤하셨다.

"목뼈를 먹으면 노래를 잘한데. 엄마는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목을 먹는거야."

그 얘기를 듣고서 '아니어요 어머니. 그 보잘것없고 먹을 것 없는 목뼈는 제가 먹을테니, 제 몫의 두툼하고 기름진 다리살과 결대로 찢어져 씹는 맛이 좋은 가슴살을 드셔요.'라고할 어린이는 세상에 없다. 철없던 세 남매는 엄마의 말을 듣고서는 "어? 나도, 나도 노래 잘하고 싶어!"하면서 엄마가 드시던 목뼈마저 달라고 졸라댔던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서로 목뼈를 먹겠다고 달려들게 되었고. 이것이 어이없는 세 남매 목뼈선점 사건의 진상이다.


엄마라고 맛있는 부분을 먹고싶지 않았을리가 있나. 엄마도 푸짐하게 살을 뜯어 입안 가득 넣고 맛을 즐기고 싶었겠지. 그저 자식들 먹이려고 참고 양보했던것을.


부모가 되고 제일 먼저 깨달은 거짓말이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였다. 아무리 아이가 배불리 먹었더라도 내가 먹은 게 아닌데 어찌 내 배가 부를까. 나 굶으면 자식들도 귀찮고 눈에 안들어왔고 짜증이 치솟핬지만, 그런 나도 엄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향기롭게 퍼지는 딸기향을 맡으면서도 가격표 보고 돌아서기를 몇날며칠, 고민하다 한 팩 사와서는 꼭지만 따서 아이들 먹으라고 주고 나는 맛도 안 보는 날이 지금껏 몇 년이던가. 혹시나 안 먹는 엄마를 보고 엄마는 딸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할까봐 "엄마도 딸기 엄청 좋아하는데, 너희 먹으라고 양보하는거야."하며 생색도 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것도 아닌데 말이다.


요즘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재료와 맛을 살린 여러 브랜드의 치킨이 넘쳐나도, 식탐많은 청소년기 아들이 둘이나 있는 우리 집은 한 달에 못해도 서너번은 먹는다. 한 마디로는 어림도 없고, 두 마리를 시켜도 모자라서 밥도 같이 먹여야한다. 다행히 식구가 넷이고 다리도 날개도 넷이라 나도 한 조각씩은 먹을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목뼈를 찾아 먹는다. 그러면서 내 어릴 때 목뼈에 얽힌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천상 T인 큰 아들은 목뼈가 들어있느냐 없느냐로 국산닭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근거모를 이야기를 하고, 작은 아들은 엄마는 목뼈말고 살먹으라고 말해준다. 치킨에 곁들인 맥주 탓인지, 목뼈가 떠올린 어린 날 때문인지, 아니면 다정한 아들의 한 마디 때문인지, 목뼈를 맛보며 늙은 내 엄마를 생각한다. 나에게 목은 맛은 엄마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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