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설적'이라는 굴레

by 조유리

대학원의 소설 창작 수업에서는 초단편소설을 써서 내는 것이 기말과제였다. 그리고 학기말에 세미나를 열어 교수가 수강생들의 작품에 대해 논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수는 학생 이름을 빼고 작품명만 밝힌 뒤 평을 시작했다. 혹시 내 작품을 언급해주지 않을까, 하며 뭉근하게 가슴을 덥히던 기대감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은 교수가 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였다.

“이 설정은 현실에서는 너무 개연성이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은 문장력은 좋지만 중간에 시점이 일관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어요”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물을 제시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힘있게 풀어나가지 못하고 인위적인 수준에서 그쳤습니다.”

교수의 코멘트가 대부분 단점을 지적하는 것임을 깨닫자 오히려 내 작품은 언급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강렬하게 솟았다. 다행히, 내 글은 작품평에 오르지 않은 채 질의응답 시간으로 넘어갔다.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내 글은 말하지 않는 걸 보니 그래도 읽을만 했나보군’

혼자 내린 판단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에 힘이 좀 풀리는 듯 했다.


수강생들의 질문은 봇물 터지듯 했다. 한 학생이 초단편소설의 분량을 맞추는 데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과제로 낸 글을 앞으로 어떻게 수정하여 더 긴 단편소설로 완성해 나가면 좋을지 질문했다.

“그건 글마다 좀 다른데요,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설정이 좀 억지스러운 작품은 길이를 좀 늘려서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풀어주는 것이 좋고요…….”

교수는 뒷말을 잇지 않고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아, 참!”하고 소리쳤다.

순간, 내 온 몸을 감싸는 슬픈 직감. 왠지 내 얘기가 이제야 나올 것 같은 느낌. 교수의 외침이 내 가슴을 직접 타격이라도 한 듯 갑자기 심장이 쿵, 가라앉더니 등줄기에 소름이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아, 아까 작품평을 할 때 놓친 작품이 있었네요, <저 창을 두드릴 때>라는 글이요. 이건 주인공의 심리적 흐름이 잘 드러나 있는 좋은 글이었는데 소설적인 상황이나 설정이 부족해요. 그저 기억을 회고해서 풀어놓은 글 같죠. 이렇게 글 자체가 소설의 좋은 재료에서 멈춘 글은 분량을 늘리려는 시도보다는 좀 더 소설적인 장치를 더해서 글을 수정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아, 차라리 다른 글 언급할 때 함께 묻어갔더라면 평도 짧았을텐데 뒤늦게 따로 ‘처리’되다보니 꽤나 구체적인 평가가 더해졌다. 게다가 그 내용에도 뜨끔했다. 시적 표현이건 소설적 상상이건 전혀 없는 채로 사실적인 글만 쓰며 살아온 인생 전체가 들통이 난 느낌이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은 내가 써 낸 글이 나의 최선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수는 최근에도 신작 단편집을 낸 유명한 전업 작가인데 별로 드라마틱한 요소 없이도 인생의 갈등과 파동을 잔잔하게 그려내는 그의 소설을 내가 좋아했고 이번 과제를 하면서도 그의 작품은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글을 본보기 삼아 쓴 글에 대해 해당 작가가 문제를 지적하니 나로서는 옅은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그의 글이 아닌 SF나 연쇄살인 추리극, 막장 드라마나 좀비 소설을 레퍼런스로 삼았다면 좀 더 '소설적 상황'을 담을 수 있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 안에서 인간이 겪는 소소한 고민을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평을 들은 후 생각하니 차라리 SF 같은 소설이 그 ‘소설적 상황’을 담기에는 더 용이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날 이후로 내 머릿 속에서는 ‘소설적 상황’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저 맴돌 뿐, 그것이 무엇이고 뭘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는 당췌 모르겠다. 내가 경험한 복지와 돌봄에 대한 내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창작에 도전했으나 평생 기사문과 에세이만 써 온 나에게 상상이란, 창작이란 이제서 시도하기엔 이번 생은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


세미나 이후 약 한 달 동안 소설은 죽어도 못 쓸 것 같다는 좌절감을 안고 지내다가 문득 나의 독자로서의 생활을 돌아보았다. 참, 그렇게나 편협했었다. SF는 터무니없어서, 스릴러는 무서워서, 막장은 말이 안 되어서, 로맨스는 오글거려서.... 이런저런 이유로 매우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작품만 소비했고 소설 자체를 많이 읽지도 않았다. 책꽂이는 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책이 채우고 있다. 그걸 새삼 깨닫자 이번 생에 소설은 다시 못 쓸지라도 더 다양한 소설을 읽을 시간은 아직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적 상상은 커녕, 나는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정리하는데도 몇 시간이 걸려, 이 글을 쓰면서도 질겅질정 오징어만 잔뜩 씹어대고 있다. 배우면 배울 수록 쓰기가 더 어려워진다. 마구 뱉어놓고 혼자 뿌듯해하던 시간이 오히려 더 행복했던 것도 같다.


예전보다 많이 알아서 시도가 어려워지는 단계, 충분히는 몰라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단계. 나는 딱 그 지점을 밟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를,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