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 이야기: 미국 뉴욕
뉴욕은 ‘나쁜 남자’다.
*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나 꿈틀꿈틀 생명력이 있는 듯하다. 남들은 다 좋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안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정을 주고 싶은데 자꾸 밀어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별로였지만 알수록 편안해지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유 없이 좋은 사람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절머리 나는 사람도 있다.
뉴욕은 화려한 슈트를 차려 입고, 자기애가 뚝뚝 흐르는 미소를 지은 채,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남자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도 끊임없이 내게 부족하다고 말하며 나를 왠지 초라하고 외롭게 만드는, 그런 ‘나쁜 남자’.
*
5년 전 왔던 뉴욕은 ‘개고생’ 그 자체였다.
‘오페라의 유령’ 티켓을 사고 나니 지갑이 텅 비어 한인 마켓에서 산 쌀과 밑반찬 세 가지로 열흘을 버텼다. 유례없는 폭설로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다녔고, 전쟁터 피난민을 방불케 하는 타임스퀘어 앞 군중들 속에서 눈을 맞으며 5시간을 기다려 허무한 신년 카운트다운을 했다.
다시 찾은 뉴욕. 나는 왠지 뉴욕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그동안 난 꽤 많이 자랐다고, 큰 꿈을 품고 세계여행을 떠나 온 여자라고, 5년 전 초라한 내가 아니라고,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다. 더 이상 마음에도 없는 옛 연인 앞에 가장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어 하는 여느 여자의 미묘한 심리처럼, 나는 큰 맘먹고 마음에 쏙 드는 재킷도 하나 사 입었다.
*
헤드헌터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오피스 칵테일파티에 초대받았다. 뉴욕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친구의 오피스 빌딩 루프탑에서는 타임스퀘어와 뉴욕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한눈에 보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찬란한 마천루, 화려한 뉴욕의 밤. 누구나 여기 올라와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아, 내가 좀 잘 나가는구나!’라고 착각하게 될 것 같은 그런 곳.
세련된 오피스룩으로 차려 입고 한 손에 칵테일을 한 잔씩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은 세일즈 스킬을 공유했고, 아파트를 사는 이야기를 했고, 또 차를 사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소개를 하면서 조금 머뭇거리게 되었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찾겠다고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사실상 백수’라는 내 직함이 이 곳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
그랬다. 뉴욕은 여전히 내게 '나쁜 남자'였다.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영원히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가을의 센트럴파크는 총천연색으로 아름다웠고, 쉑쉑 버거는 여전히 입에서 살살 녹았다. 하지만 그 얼마나 유명하고 화려한 옷일지라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몸에 걸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나쁜 남자에게서 돌아섰다. 그도 굳이 나를 붙잡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JFK 공항을 훌쩍 떠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또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덧, 네 번째 샌프란시스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