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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yong Julie Sim Nov 20. 2016

이별 정리 여행: 사랑은 지나갔지만, 다시 이 자리에

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 이야기: 미국 시애틀

K야, 아마 지금쯤 너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시애틀은 어땠어?’라고 묻고 싶겠지.

내가 옛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또 시애틀에 갈 거라고 하니, 너는 나보고 고통을 즐기는 변태냐며 고개를 저었었어. 아니, 사실 널 볼 순 없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너의 모습이 안 봐도 눈에 훤하더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떠난 세계여행에서까지 왜 굳이 과거로 역행하는 도시를 들러야만 하냐고, 힘겹게 아문 상처를 왜 이제 와서 또다시 들추러 가냐고... 그 말들을 속으로만 삼키고 있을 너의 모습이 말이야.   

하지만 K야, 어떤 도시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아.

시애틀, 그곳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와 내가 어느 노래 가사처럼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본' 곳이며,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 서서히 눈덩이처럼 불어나다가 스르르 녹아버린 곳이기도 해.

나는 ‘시애틀’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갑자기 밀려드는 오만가지 감정들에 그만 아찔해져, 잠시 멈춰 서서 시퍼렇게 멍든 하늘을 바라보곤 했어.

그래서 나는 시애틀에 꼭 다시 가야만 할 것 같았어. 그곳에 가서 기억이 머문 장소들을 혼자 구석구석 걸어 다녀야, 비로소 모든 게 깨끗이 정리될 것 같았거든. 그래야만 더 이상 ‘시애틀’이라는 단어의 요술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어. 그것으로도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어.



*

K야, 사실 나는 영화 ‘만추’의 탕웨이처럼 안개 자욱한 거리를 트렌치코트를 입고 시크하게 거닐며 옛 기억 속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상상했거든? 그런데 우리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걸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잖아, 그렇지? 그걸 알면서도 매 번 잠시 착각해버리지 뭐야. 역시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

내가 있는 내내 시애틀은 비가 후드득 후두둑 쏟아지고, 춥고, 우중충했어.  

당장 비를 피해야 하니 우산을 사야 했고, 신발에 비가 새니 튼튼한 부츠도 사야 했어. 영화 분위기 좀 내보겠다고 여행자 신분에 비싼 트렌치코트를 덜컥 사 버릴 순 없으니, 캐리어 속 유일한 겉옷인 검정 가죽 재킷만 주야장천 입고 다녔어. 비바람 부는 날씨에 얇은 가죽 재킷을 입고 덜덜 떨면서, 뒤집어지려고 하는 우산을 붙잡고 낑낑대는 모습은 결코 시크할 수 없었지.

‘고독한 여행’을 하기로 작정하고 왔기에 4일 내내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모든 끼니를 혼자서 해결하면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어. 추억이 깃든 장소를 지날 때면, 마음속 어딘가에 꾸역꾸역 짓눌러 놓았던 옛 기억들을 눈을 감고 한쪽, 한쪽, 끄집어내었다가, 눈을 뜨고 한 자, 한 자, 빗물에 흘려보내주었단다.

K야, 네가 우려했던 것처럼 그 과정은 꽤나 고통스러웠어. 마치 닦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몇 년 동안 외면해 오던 가스레인지의 묵은 기름때를 어느 날 갑자기 물로 불리지도 않고 벅벅 다 벗겨내겠다고 애쓰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의식이었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나 혼자서만 치를 수 있는 의식...   

  

*

비 내리는 워터프런트 공원에서 시애틀 대관람차 불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그리워하는 건 어쩌면 그가 아니라,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말이야.

아마 말 마디마디마다 눈물이 배어 나오던 새벽에 너를 붙잡고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에 이 말을 쓰윽 꺼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확신이 없었을 그 문장이, 혼자 시애틀을 구석구석 걸어 다니다 보니 점점 더 명료해지는 것 같았어.

그래, 내가 그토록 못 잊고 그리워하는 건 그 시절의 나구나. 한 발짝 다가와주는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이유가 나의 기준이 ‘그’이기 때문이었기보다는 진정한 행복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나’이기 때문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온전히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구나.

그제야 ‘스스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행복할 수 없다’는 구절이 더욱 마음 깊이 와 닿았어. 그리고 다시 그렇게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사랑에 빠지려면, 나 자신이 가장 나답고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그렇게 사는 게 최우선 순위일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K야, 나는 이렇게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가슴 벅차도록 감사해졌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여행을 하는 게 맞는지,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매일 밤 자문하며, 종종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걸 찾고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고자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 자신을 한 번쯤 칭찬해 주고 싶기도 했어.


그러니, 고독을 자처하고 굳이 춥고 외로운 시애틀로 온 건 꽤 잘 한 일인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

시애틀 여행 마지막 날, 조금씩,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시애틀을 조그만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생각했어.

‘시애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나는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때 떠오르는 감정은 내 마음을 더 이상 따끔따끔 찌르지 않고, 나를 잔잔히 미소 지을 수 있게 만들 것 같다고.

이제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꽤 오랫동안은, 어쩌면 평생, 이 곳을 다시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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