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기 전까지 다듬었던 ‘모나라자’는 실패작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신가의 작품이 실패작이라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레오나르도의 다른 그림 ‘최후의 만찬’에는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는 예수의 말이 있었던 직후, 제자들의 반응이 담겼다. 충격에 휩싸인 열두 제자의 동작을 보면 마치 영혼을 실은 감정의 파문이 예수를 중심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감정의 표현에 능통한 레오나르도는 리자 부인에게서 느낀 다양한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 완성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의뢰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모나리자’를 보관하면서 반복해서 고치고 다듬었다.
실크 상인으로 성공한 프란체스코 델조콘도는 사랑하는 젊은 아내에게 초상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유럽 전역으로 상권을 키워가던 프란체스코는 최고의 화가를 원했다. 누구에게 맡길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상화를 그리도록 레오나르도를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회화보다는 과학 연구에 심취해서 마지못할 상황이 아니면 붓을 들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프란체스코는 오랫동안 공증인으로 자기 일을 도와주었던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피에로에게 부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리자 부인을 그리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는 그녀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미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화실을 방문한 리자 부인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초상화 모델이 돼 화가 앞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그 시간이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그 시간만큼은 들고나는 숨에서 비롯되는 온전한 나의 감각과 보이지 않는 근육들의 떨림까지,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나’이면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시간이다. 복잡한 일련의 심리적 반응은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나타난다. 표정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그림이라면 그 초상화는 살아 숨 쉬는 그림일 것이다.
리자 부인은 손만 내밀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부드럽게 전해 오는 숨결에서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명한 선으로 그리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렇게 그린다 한들 누구 하나 레오나르도를 향한 찬탄과 존경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손끝은 생각이 달랐다. 그녀의 숨결은 레오나르도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신만의 우주와 만나는 중이었다. 그 만남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정의 파문은 레오나르도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녀의 미소가 신비로워질수록 레오나르도의 머릿속은 더욱 흐릿해졌다. 알 듯 모를 듯 미소 짓는 리자 부인 앞에서, 레오나르도는 겉모습만으로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일 중요한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결과였다.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입과 눈 부분을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었다.
잘 알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없는 사람에게 자기를 정직하게 보여 주는 사람은 없다. 대상으로 세우고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로는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다. 관계를 맺지 못하면 인식도 없다는 레오나르도 자신의 실패를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다.
그림 읽기도 마찬가지다. 나와 관계를 맺지 않는 그림은 정직하게 자신을 보여 주지 않는다.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문 사람에게 그림은 물론 그 누구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림에서 이어진 선(線)이 ‘나의 서사’에 닿을 때 그림과 나는 비로소 대화를 시작한다.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사람만이 그림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