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작약> 야수파로 불리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가 그린 정물화다. 불타는 듯 선명한 원색은 꽃이 아니라 숫제 붉음이다. 이런 붉음 앞에 서 본 적이 있던가. 선명한 빛깔에 꽂혀서 부러 꽃집에 들러 작약을 보았다. 저리 붉지 않았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손목을 그었을 때, 붉은 피는 흰 접시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영혜를 들쳐업을 때 흰 셔츠를 흠뻑 적셨던 선혈이 캔버스로 옮겨진 것일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저항하던 영혜의 뺨을 때리고, 우격다짐으로 입안에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는 폭력만큼이나, 그것에 맞서는 영혜의 반항은 거세고 충격적이다. 몸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그을음 같은 비명, 희번덕거리는 짐승의 눈 그리고 솟구치는 피, 여기에 낮게 퍼지는 피비린내까지. 지금까지 목격한 어떠한 장면보다도 생생하고 강렬하게 세상에 항의하며 맞서는 몸. 아! 저 붉음은 몸짓이었구나.
<중략>
<몽고반점>에서 비디오작가인 주인공 ‘나’ 역시 현실의 위선과 허위를 촬영하여 고발하고 폭로하는 작업에 나름의 사명감과 열의를 가지고 살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모되고 찢긴 인간의 일상을 영상에 담아왔다. 무엇의 위선을 고발하려면 먼저 그 무엇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더라도 그 무엇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것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게 된다. 영혜의 저항은 ‘나’의 삶에 근본적 회의감을 갖는 계기였다. 작업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 그리고 그 감정의 밑바닥을 직시하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고발이든 저항이든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영혜의 원초적 몸짓은 정직하게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소나무 그늘이 유리창의 흰 살을 더듬듯, ‘나’는 순수한 욕망의 그림자를 따라가 본다. 빠지기 시작한 머리털과 늘어진 아랫배에 익숙해진 중년의 남자에게 찾아온 본질적 욕망, 그것은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다. 그 이미지는 한순간 나에게로 왔다. 우연히 존재를 알게 된 처제 영혜의 몽고반점.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꽃이 열리는 장면은 ‘나’를 충격했다. 내면의 그림자는 몽고반점에서 퍼져나간 꽃들로 온몸을 칠한 남녀가 교합하는 상상의 장면을 더듬어 간다. 치명적이다.
가고 싶은 길은 한사코 버려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아니 이 지옥을 벗어나는 길은,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몽고반점은 푸른빛을 더한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 몽고반점은 훼손되지 않은 태고의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