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바람에 눕지만 일단 흔들림이 시작되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월간 우리時에 『강태운의 화삼독畵三讀』기명으로 미술인문 글 연재를 시작합니다. 첫 글입니다.
양심은 타인의 무게다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에게 조각이란,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던 어떤 형체를 풀어주는 일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돌 쪼는 일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막 십자가에서 내려져 축 늘어진 자식을 굽어보며 비통함을 억누르는 여인은 그렇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피에타⌟가 전시될 공간은 어두운 곳이었다. 어둠은 한사코 몰려왔기에, 희미한 빛에도 스스로 빛나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악착스레 윤을 냈다. 물집이 터진 살은 아물 줄을 몰랐다. 달이 하루처럼 흘러갔다. ‘그만 멈추라.’ 조각은 신의 계시였다.
피에타(Piet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98-1499, 바티칸 성베드로성당
피에타 론다니니, 1552~1564,195cm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마지막 작품
미켈란젤로는 어떤 순간에 돌 쪼는 일을 멈추었을까. 조각에 멈추는 지점을 알려 주는 규정이나 프로세스는 없다. 계시는 칼의 서슬을 퍼렇게 하듯, 감각을 예리하게 벼리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조각은 훼손하는 행위다. 더 이상 훼손할 수 없는 지점에 가닿을 때까지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낸다. 너무 쉽게 훼손되지만, 결코 훼손시킬 수 없는 곳. 곧 사라질 것 같지만,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곳. 그곳이 본능적으로 감각되는 순간, 미켈란젤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켈란젤로는 삶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쓰러지고, 그곳에서 일어나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집에서 대로大路로 나가는 길목에 슈퍼가 자리했다. 정확히는 슈퍼마켓이다. 노인 내외가 돌아가며 매장을 지켰다. 호칭은 슈퍼 할머니, 슈퍼 할아버지였다. 골목길이고, 가게 입구에 카운터가 있어 지나가는 길에도 안과 밖에서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나눴다. 출근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인사하고, 퇴근하면서 할머니에게 인사하니 어쩌면 하루의 시작과 끝을 나누던 관계였다. 아이들도 학교에 오가면서 인사를 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가면 이름을 부르시며 예뻐하셨다. 외상도 가능했다. 아이 혼자 심부름을 보내도 전혀 걱정되지 않는 곳이었다.
결혼할 때 아내와 다짐한 게 몇 가지 있다. 동네 가게를 이용하자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가까운 이웃과 관계를 이어 나가는 작은 실천이 동네라는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고,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 가족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아내와 둘이 살 때는 괜찮았다. 아이를 낳고 커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으로 치면 편의점보다 조금 큰 슈퍼에는 아이들 물건과 식재료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찾았다. 큰 매장에 가면 계획에 없던 물건을 사게 된다. 지척에 물건을 두고 슈퍼마켓을 따로 찾는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물건을 살 때는 몰랐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할아버지가 내다보실 텐데 어쩌지. 이미 골목으로 들어섰고 방법은 없었다. 목인사를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이후로도 슈퍼와 대형마트를 모두 이용했다.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는 다른 골목길을 택했다.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뒷길로 우회해야 했다. 할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양심良心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려는 마음”으로 이해해 왔다. 헌법재판소가 이해하는 양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양심은 윤리적인 판단 이전에 찾아오는, 작은 떨림에 더 가까웠다.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하고, 깨어 있게 하는 감각. 양심은 단단한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내가 관계 맺고 있는 타인과 세계의 시선이 내 안에서 각성되는 떨림이었다.
『소금꽃 나무』에서 노동운동가 김진숙은 전태일 평전을 읽은 후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라고 소회를 털어놨다. 나는 한동안 그 말을 ‘심지가 단단한 사람’으로 바뀐 계기로 읽었다. 김진숙은 용접공으로 일하다 부당해고를 당한 뒤, 309일간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하고, 평생을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싸워온 단단한 사람이지 않던가. 오독誤讀이었다. 다시 읽은 김진숙은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라고 적었다.
김진숙이 말한 ‘큰 산’이란 단단한 의지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 산은 무거운 책임과 고통의 무대였고, 그 산에서 쏟아지는 돌덩이들은 현실의 무수한 질문과 성찰이었다. 그것은 돌팔매처럼 양심에 부딪혀, 가슴 속에 깊은 흔들림과 갈등을 일으켰다. 김진숙은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은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산만큼의 타인을 자신의 내면에 허락하고, 그 타인들이 던지는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흔들림은 양심의 본성이다. 갈대처럼 흔들리고, 휘청이며, 때로는 부러질 듯 위태롭다. 바람에 눕지만, 일단 흔들림이 시작되면 쉽게 멈추지 않는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현실을 마주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 뿌리내린다. 흔들릴수록 깊어지는 뿌리처럼, 양심은 흔들림을 통해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산은 흔들리지 않지만, 갈대는 흔들리며 살아간다.
소설가 한강은 조각가다. 한강이 사용하는 도구는 질문이다. 한강의 질문은 답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질문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는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사랑이란 무얼까?’
한강은 5·18 광주뿐 아니라 국가 폭력의 다른 사례를 읽으며 이십 대부터 마음에 품었던 두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긴 역사에 걸쳐 반복된 학살의 증언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 질문들은 점점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한강은 1980년 오월 광주에서 계엄군 재진입을 앞두고 끝내 도청 옆 YWCA를 떠나지 않았던 한 젊은 야학 교사 박용준의 일기를 읽으며 이 질문들을 다시 마주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은 깨달았다. 이 질문들은 거꾸로 뒤집혀야 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죄책감 없는 폭력, 브레이크 없는 욕망,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관심. 사람들은 그곳에서 쓰러진다.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존엄하다. 사람들은 부서진 곳에서 일어나 다시 시작한다. 인간은 참혹하면서도 존엄한 존재다. 두 벼랑 사이를 가르는 심연을 건너려면, 죽음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증명한 ‘양심’의 도움이 필요하다. 삶과 죽음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시집을 끼고 다니며 니체도 모르는 아저씨들을 비웃던 회사원 김진숙의 죽음과 노동자 김진숙의 탄생 사이. 살아서 참혹한 희생자로 남느니 죽어서 존엄을 지킨 존재 사이. 양심은 그렇게 관계 사이에 존재한다.
양심은 사람을 배려하고 관계를 잇는 인간학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일생에 들어가 있는 시대의 양을 준거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시대의 양’을 ‘타인의 무게’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시대란 곧, 내가 마주친 타인의 얼굴이며, 그들과 지은 관계의 흔적이다. 그러니 양심이 뿌리내리는 땅이란 바로 관계의 토양이며, 공동체의 기억이다. 양심이 불안한 전율을 시작하면 내 시선은 타인을 향하고 관계는 조직된다.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처음처럼 태어난다. 양심이 떨림을 멈추는 순간 관계는 무너진다. 양심은 한 개인의 뜨거운 심장, 즉 빨갛게 팔딱거리는 아픈 점點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線이며, 관계를 조직하는 장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