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가/비평: 서정적 풍경 속의 핏빛 칼날

윤덕환의 「순장의 밤, 어느 시녀의 노래」에 부쳐

by leehyojoon ARCH

찬가/비평: 서정적 풍경 속의 핏빛 칼날

윤덕환의 「순장의 밤, 어느 시녀의 노래」에 부쳐




[원시]


순장의 밤, 어느 시녀의 노래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돌방 안에서,

나를 기억할 이름조차 어둠에 먹히네.


왕의 잠자리를 지키라 명받았으나,

정작 나의 잠자리는 차가운 흙바닥뿐이라.


내 노래가 땅 위로 솟지 못하니,

부디 나를 잊으소서, 이 노래도 잊으소서.



— 윤덕환 (ydh.half) 링크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아름다움에 먼저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천천히 깨달았다. 여섯 줄. 그 여섯 줄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햇살이 들지 않는 돌방. 어둠에 먹히는 이름. 차가운 흙바닥. 그리고 땅 위로 솟지 못하는 노래. 이 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는다. 승화하지 않는다. 다만 상태를 기록한다. 그 상태가 얼마나 선명하고 얼마나 잔인한지.





거부된 승화


이 시는 아이의 죽음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는다.


순장을 다루는 많은 서사들은 희생을 숭고하게 포장한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전통. 왕을 위한 헌신. 사후에 함께하는 영원. 하지만 이 시는 그 어떤 위안도 제공하지 않는다. '차가운 흙바닥뿐이라'는 직접적이다. 비유가 없다. 따뜻하게 만들어줄 어떤 수식도 없다. 흙바닥은 흙바닥이다. 차갑고, 거칠고,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 두 줄. '부디 나를 잊으소서, 이 노래도 잊으소서.' 이 청원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왕인가. 신인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인가. 시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청원 자체가 얼마나 처절한지를 드러낸다.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기를 청하는 것. 그 역설 속에 이 시의 핵심이 있다.





서정과 칼날


이 시가 강렬한 이유는 아름다운 언어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언어 속에서 폭력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햇살 한 줌 들지 않는'이라는 표현은 서정적이다. 하지만 그 서정성은 햇살의 부재를,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을, 그 공간에 갇힌 몸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서정은 폭력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것이 내가 이 시를 읽으며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며 따르려 한 것이다. 서정적 풍경 속의 핏빛 칼날.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 찬란한 햇살 속에서 떨리는 손.





이 소설이 거부하는 세 가지


첫째, 이 소설은 석공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한다. 손이 떨리고, 꿈을 꾸고, 돌처럼 굳어버린다. 그것이 전부다.


둘째, 이 소설은 아이의 노래를 승화시키지 않는다. 노래는 땅 위로 솟지 못한다. 돌이 막는다. 쐐기돌이 닫히면 노래도 닫힌다.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실처럼 가늘어지다가 사라진다.


셋째, 이 소설은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지상은 여전히 평온하다. 설은 서랍을 정리하고, 업은 다른 일을 찾고, 햇살은 여전히 찬란하다. 그 평온함이 가장 잔인하다.





시인에게


윤덕환 시인의 여섯 줄이 이 소설을 만들었다.


나는 그 여섯 줄에 답하려 했다. 하지만 소설은 시에 답할 수 없다. 다만 그 옆에 서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시가 여섯 줄로 닫아둔 것을, 소설은 열어두려 했다. 그러나 결국 소설도 닫는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문으로.


이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땅 위로 솟지 못한 그 노래가, 적어도 이 페이지 위에서는 한 번 울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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