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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눈 Jul 09. 2019

그 많던 도토리는 누가 다 주웠을까

나눠 먹는 건 되지만 뺏어 먹으면 안 되지

 가을의 산은 아름답다. 또 가을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풍요로운 계절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머무르는 계절은 모두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한낱 인간인 나에게는 날씨가 본격적으로 따뜻해지고, 내가 좋아하는 파스텔 느낌의 아기자기한 느낌인 봄과 함께 무슨 만두처럼 우리를 찜통에 대고 찌던 태양이 좀 관대하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맞이하게 되는 빨갛고 노란 원색이 화려하고 강렬한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사실 우리의 사계절은 모두 감각으로 먼저 찾아온다. 먼저 봄은 색깔로 맞이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제 색을 꽁꽁 감춰둔 온갖 풀과 나무가 다시 힘차게 생명의 색깔을 뿜어낸다. 노란 개나리와 분홍색 벚꽃이라는 관용적인 색깔 몇 개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예쁜 색깔이 솜씨 좋은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온 세상을 조화롭게 꽉 채운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공기로 제 도착을 알린다. 여름은 습하고 더운 공기로 시작되고, 비가 한바탕 내린 뒤의 풀의 냄새로 기억된다면, 겨울은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로 시작된다.


 가을의 시작은 나에게는, 소리다. 온갖 나뭇잎이 낙엽으로 떨어지고 나면, 이걸 밟는 소리가 가을을 알린다. 완벽하게 잘 마른 나뭇잎을 보면 참지 못하고 꼭 밟고 지나가게 되는 것도 이맘때이다. 좀 덜 마른 나뭇잎은 덜 마른 나뭇잎대로 잔뜩 쌓여 축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낸다. 그래서, 이 소리가 좋아서 가을은 일부러 나뭇잎이 많은 곳을 찾기도 한다. 본가 근처의 호숫가 산책로나, 또 그 근처에 단풍으로 유명한 산에 종종 가는데,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날씨도 좋고, 종종 도토리나 밤도 주워가면서.


도토리. 등산객에게는 즐거움이지만 다람쥐에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최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잠깐 나선 산책로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임산물을 함부로 채취하지 마시오." 좀 더 걷다가 보면 벌금이 얼마고, 심지어 징역도 얼마나 살 수 있다는 살벌한 경고문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 조금만 길을 걷다 보면, 주머니 가득 밤이나 도토리를 주워서 배낭에 넣는 등산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재미로 아이들과 함께 몇 개 주워서 가져가는 사람들도 많고,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고 밤이나 도토리를 엄청나게 주워가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법도 법이지만 이런 열매를 함부로 주워가면 안 되는 이유는 또 있다. 도토리, 밤, 잣 등의 열매는 껍질이 딱딱해 쉽게 무르거나 상하지 않아 겨울에도 야생 동물들의 좋은 영양 공급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람쥐는 가을이 되면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와 밤 등의 열매를 서식지 전체에 걸쳐 구덩이를 파고 저장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후각이나 청각을 동원해 꺼내서 먹고 다시 잠든다. 또한 이런 열매들은 다람쥐 등의 소형 설치류 뿐 아니라 멧돼지나 곰, 고라니 등 대형 야생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이런 딱딱한 열매류는 누군가의 먹이가 될 뿐 아니라 누군가의 집이 되기도 한다. 산책을 하다 보면 가끔 구멍이 뚫린 밤이나 도토리 등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이 구멍은 거위벌레가 파고 알을 낳은 구멍이다. 즉, 이런 열매들은 누군가에게는 집이자 먹잇감이다. 헨젤과 그레텔이 발견한 과자로 만든 집처럼, 제 집을 먹고 자란 거위벌레는 짝짓기를 한 뒤, 다시 열매에 알을 낳는다. 그러니까 도토리는 거위벌레에게는 집이고, 또 학교인 셈이다. 우리에게는 한 끼 맛있는 반찬 또는 등산길의 소소한 추억에 불과한 그 작은 열매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방법으로 산 곳곳에 흩어진 도토리와 밤은 이후 싹을 틔우고 다시 나무가 되어야 한다. 다람쥐가 생태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을에 다람쥐가 부지런히 저장한 열매를 다 먹지 못하거나 위치를 잊어버린다면, 그 열매는 부모인 나무로부터 어쩌면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싹을 틔우게 될 것이다. 이동 수단이 없는 식물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자손을 멀리까지 퍼지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 개입해 씨앗을 모두 수거한다면, 새로운 나무들은 싹을 틔울 수 없게 된다.


등산객에게는 단순한 호기심과 추억이지만 다람쥐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까.




 먹을 열매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책은 먹이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등산객을 습격하거나, 등산객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버린 음식을 먹는다. 너무 배가 고프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기도 한다. 영국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작품인 피터 래빗 시리즈에서도 피터의 아버지가 맥그리거 씨의 농장에 내려가 그가 심은 작물을 훔쳐 먹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래서 피터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고기 파이가 되어 맥그리거 씨의 식탁에 올랐다. 그렇다. 인간과 접촉한 대가는 꽤 처참하다.


 따라서 이 방법은 안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일찍 잠드는 것이다. 덕분에 야생 동물들의 동면 시기가 빨라졌다. 그러나 이 방법도 딱히 권할 만한 방법은 아니다. 우선 동면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번 잠들고 난 뒤 일어나지 않고 쭉 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에너지만 소모하고 있어 잠든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진짜 잠든 것도 아니다. 따라서 2주에 한 번 정도는 일어나 몸을 데워야 하고, 언제든지, 얼마든지 겨울잠을 자는 본인의 의지로 잠에서 일어날 수 있다.


 편안한 이불도 베개도 없이, 우리처럼 난로나 어떠한 몸을 데울 수단도 없는 그들에게 털갈이 외에 중요한 것은 지방의 축적이다. 당연하지만 긴 겨울을 나는 동안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조금이라도 따뜻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 먹이가 없다면, 야생 동물들은 제대로 지방을 축적하지 못하고 동면에 들어서게 된다. 본격적으로 춥고, 배고픈 겨울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반달가슴곰의 경우 좀 더 심각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곰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 출산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면 전의 곰의 영양 상태가 당연히 출산과 새끼에게 영향을 준다. 새끼를 낳는 암컷의 몸도 나빠지고, 태어나야 할 새끼 반달가슴곰의 숫자가 줄어들거나,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날 가능성이 늘어난다. 재미로 주운 도토리가 천연기념물 제329호이자 지리산 국립공원의 깃대종인 반달가슴곰의 생존을 위협하는 셈이다. 어쩌면 자연공원법 뿐 아니라 문화재보호법도 위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까치. 우리는 겨울을 나는 까치를 위해 까치밥을 남겨두곤 했다.(ⓒ에코)


 어린 시절, 할머니 댁 마당에는 큼지막한 감나무가 있었다. 어른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따는 감을 아래에서 받아 몇 개는 상자에 담는 시늉을 하고, 몇 개는 할머니께 가져가 씻어달라, 그릇을 달라, 숟가락을 달라 애교를 부리며 동생들과 나눠서 먹었다. 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 감은 정말 맛있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감나무라 열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리진 않아서 작업은 금방 끝나곤 했는데, 사다리가 거둬지고 난 뒤에도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에는 꼭 장신구처럼 빨간 감 몇 개가 달려있곤 했다.


 나중에 할머니께 여쭤보니, 까치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추운 겨울에 우리 감나무를 찾아오는 까치를 위해 남겨두는 거라고. 그러면서 할머니는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열심히 감을 먹는 손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시곤 했다. 사람도, 짐승도, 모두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 뭐든 제 입만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나눠야 많아진다. 그래야 사람이 꽉 찬 사람이 돼. 어린 마음에 무슨 말인지는 당연히 몰랐지만, 그저 입에 맴도는 감의 맛이 좋아서, 그리고 할머니의 손길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난다.


 포레스트 카터의 책『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는 파 둔 구덩이에 야생 칠면조가 무려 5마리나 빠졌지만, 주인공과 그의 할아버지가 두 마리만 잡아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심지어 제일 작은 녀석을 고르기 위해 주인공은 구덩이 안을 꽤 오랫동안 기어다니며 고민한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을 칭찬하며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다음이 있고, 그리고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양은 남겨야 한다고. 욕심을 부려 많이 쌓으면 안 된다고. 자연에서 욕심을 부리는 것은 꿀벌 뿐인데, 그래서 꿀벌은 기껏 모은 꿀을 곰에게, 또 우리에게 빼앗긴다고.


 까치밥도, 덜 주운 이삭도 모두 그 체로키 노인의 말과 닮은 구석이 있다. 하물며 냉철한 탐정인 셜록 홈즈 역시도 제가 찾은 증거는 꼭 절반만 가져간다. 그의 친구인 왓슨이 그 이유를 묻자 셜록은 자신과 함께 수사하는 경찰을 위해서 남겨둔다고 말한다. 체로키처럼, 그리고 까치밥처럼. 우리도 조금은 비우는 산책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온갖 열매나 새싹으로 꽉 채운 가방과 주머니를 비우고, 산책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다람쥐를 보지 못하기 전에, 참나무를 보지 못하기 전에, 거위벌레를 보지 못하기 전에.


더 이상 할머니 댁의 감나무는 없지만, 까치밥은 영원히 있기를 바란다.




리자 바르네케, 이미옥 역,『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세계』, 에코리브르(2019)


국민일보, 2010. 10. 27 '도토리 흉년에… 야생동물 "춥고 배고파 겨울잠 안와요"'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4261871


오마이뉴스, 2014. 09. 09 '배낭 한가득 도토리 싹쓸이… 해도 너무한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029829#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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