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정유정, 지승호 / 은행나무

by 정작가


<7년의 밤><28><종의 기원>은 정유정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지만 실제로 이 소설 중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종의 기원>을 1/3 정도 읽은 것이 전부이긴 한데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마치 소설이 영상처럼 이미지화된다는 것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과거 매스컴을 보면 정유정이라는 작가는 성실한 이야기꾼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고, 마치 이야기를 직조하는 장인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꾼의 영업 기밀을 지승호라는 인터뷰어가 밝히는 내용을 담은 것이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라는 책이다.


요즘은 그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웹툰과 웹소설을 비롯하여 OTT, 유튜브나 쇼츠 영상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는 존재한다. 그야말로 이야기가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부족한 표현일지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소설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정유정 작가를 인터뷰한 인터뷰집이 나온 것은 수많은 미래의 스토리텔러들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닥치고 정치>에서도 김어준의 인터뷰어로 활약한 경험이 있다.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신해철의 쾌변독설>과 같은 낯익은 인터뷰집으로 알려진 지승호는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터뷰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처음인 1부 등단의 여정 첫 부분을 보면 정유정이 처음부터 작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유정 작가는 간호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14년간의 직장 생활을 한 후 습작 기를 거쳐 마흔이 넘는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죽음이 우리 삶을 관통하며 달려오는 기차라면, 삶은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무언가를 하는 자유의지의 시간이다.


마치 별지처럼 파란색 큰 글씨로 책의 한쪽을 점유하고 있는 이 문구는 정유정 작가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통해 소설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과정을 피력해 놓은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책의 구성은 등단을 향한 여정, 이야기와 이야기하는 자,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법, 초고, 1차 수정, 탈고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래도 인터뷰집이다 보니 대화체라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부담은 없다. 특히 2부 이야기와 이야기하는 자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야기와 관련된 저자와 저서를 언급한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기회에 이야기와 관련된 책의 목록으로 정리해 보고, 스토리텔링을 위한 공부에 참고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관련된 저자와 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로버트 맥기 <STORY>


-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 브라이언 보이드 <이야기의 기원>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켄 키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아무래도 이 책의 핵심은 3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법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는 소재, 개요, 자료조사, 배경설정, 형식, 등장인물 등을 총망라하여 이야기를 직조하는 기본 뼈대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개요의 ‘소설을 시작하는 여섯 가지 질문’은 주목할 만하다.


- 등장인물은 어떤 사람들인가


-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 그들은 왜 그것을 원하는가


-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는가


-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자료조사를 언급한 부분에서도 작가가 주장하는 내용은 곱씹을 만하다.


작가는 자기가 만드는 세계에 대해 신처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세계에선 파리 한 마리도 멋대로 날아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전지적 시점을 구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기본적인 지식과 전문지식에 통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배경지식은 물론 특수한 환경에서 알아야 할 전문지식의 필요성은 소설에 더욱 큰 신뢰감을 불어넣어 준다. 시공간을 설정하는 작업에서도 작가의 당부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소설은 반드시 ‘그들의 세계’를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 세계는 곧장 개연성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형식은 이야기에 어떤 옷을 입힐 것인가 하는 의문에 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고, 등장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은 고유의 임무와 위치를 부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야기에 대한 구성이 개략적으로 끝났으면 집필로 들어서야 한다. 집필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고다. 어떤 초고를 쓰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전개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가 정의한 초고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초고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쓴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건 영감이라기보다 내 의식 표면에 깔린 이야기에 가깝다. 이는 단기기억에 들어 있었다는 건데 대개 어딘가에서 읽었다든가, 봤다든가, 들었을 공산이 크다.


서술의 관점에서 작가가 주창하는 요목 또한 한 번쯤 되새길 만한 지침으로서 유효할 것이다.


- 문장은 이야기에 복무해야 한다


- 목소리는 문체보다 중요하다


- 모든 묘사는 극화되어야 한다


-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비유는 안 쓰느니만 못하다


- 대사는 변형된 서술 혹은 해설이다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인터뷰어인 저자가 언급하다시피 정유정 작가의 창작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영업 기밀인데도 괜찮겠냐는 우려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의무는 하나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


작가로서, 이 책의 저자로서 정유정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함축된 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한국형 시나리오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