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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건축과 왕릉

자연과 인공의 고전적 조화미

by 정작가


한 시대의 역사를 규정짓는 기준은 명확하고 오류가 없는 것 같아도 후대의 논리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술된다는 말 또한 그런 측면에서 보면 괜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저자 또한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이를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만들어낸 역사 용어일 뿐’이라고 단서를 다는 것도 실체적 진실과 역사를 규정하는 방식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삼국사기》에 실린 문헌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상대 신라, 중대 신라, 하대 신라로 신라를 3분 했던 기록을 들췄던 것 또한 역사 속 문헌과 정치, 사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그 시기가 사뭇 달랐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자가 기존의 주장과 기록을 토대로 미술사를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록 오류로 가득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 상황에서는 정설로 여겨지고, 사학계 또한 그런 비판의식 없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실의 첨병이어야 할 학자들이 진리추구는커녕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배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유홍준 작가와 같은 깨어있는 학자가 있어 조금이라도 이런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장에서는 통일신라 이전의 시기인 고신라는 다루지 않고, 통일신라시기를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중대신라와 하대신라가 바로 그 시기인데, 저자의 관점에서 신라의 문화가 꽃피웠던 시기를 통일신라, 즉 후기 신라에 초점을 맞췄던 이유 때문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중대신라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부터 150년간을 일컫는 시기다. 이 시기의 유물적인 특성으로는 쌍탑 가람이 출현하였고, 이는 통일신라의 사찰을 건립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유명한 건축물로는 의상대사 지은 사찰을 들 수 있는데, 영주 부석사, 합천 해인사, 구례 화엄사 등이 그것이다. 불상으로는 금동불, 석불, 마애불, 처철불 등 다양한 형식이 불상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통일신라의 고전 미술은 8세기 중엽 경덕왕 대 꽃 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등을 들 수 있다. 금속 공예의 예술적 역량은 감은사탑, 송림사탑, 석가탑 등에 봉안된 사리장엄구와 같은 유물에서 그 의의를 검증할 수 있다.


하대신라를 다루는 장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역사적으로 짚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시기는 저자가 지적한 대로, 문화가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유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은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고, 하대신라가 철불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건축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물 중 다루고 있는 것은 사천왕사의 쌍탑 가람 형식과 월지궁 임해전, 포석정, 불국사, 석굴암 등이다. 여기서 사천왕상의 쌍탑 가람 형식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불교의 예배 의식과 관련이 있다. 기존의 탑에서 불상으로 중심을 옮겨간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구하기 힘들면서 일어난 변화라고 기술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전에는 절이 절대자의 분신을 모신 예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현실적인 여건으로 그런 기능이 단지 사찰을 상징하는 건물로 바뀌게 되었고, 그 가운데 불상 예배를 중심에 두는 현재의 방식으로 고착화된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저자는 쌍탑 가람 배치는 금당을 가람의 중심으로 놓기 위한 구조적 변형의 일환이었다고도 기술하면서도, 단순히 이런 조형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건축 형식으로도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당대 건축물이 단순히 조형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에게 정신적인 가치를 심어주는 역할도 담당할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월지궁 임해전(안압지)을 소개하는 장에서 주목할 대목은 월지와 임해라는 명칭의 유래를 《삼국사기》라는 문헌에서 상세한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월지궁 정원의 조형 양식과 연못의 입수구 등에 대한 세부 묘사와 미적 기술을 보면, 미학적 가치에 근거한 조형 예술의 특징을 실감할 수 있다. 사진 도판에서 안압지와 월지궁 연못을 보면, 저자의 이런 미학적 판단이 결코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포석정은 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신라 패망의 유흥 문화를 떠올리는 상징적인 유물로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태평성대의 유희 문화가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방식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의 견해처럼, 단편적인 견해로만 역사적인 유물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건축, 조경, 조각 등 미학적인 가치를 되새기는 관점에서 본다면 보다 객관적으로 미적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다.


‘사찰 건축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불국사는 그 명칭만으로도 건축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저자 또한 그런 건축물의 가치답게 ‘김대성이 주관하여 25년여 만에 완성한 통일신라 건축의 백미’라고 이를 평가하고 있다. 불국사의 창건 동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 소개하고 있다. 이 장에서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불국사 창건 당시 2천여 칸의 대찰이었다는 언급만 있었을 뿐 원래 어떤 구조로 불국사가 설계되었고, 임진왜란 때 전소되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는지 전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확실한 근거 자료가 없어서 설명하지 않은 것인지, 개략적으로라도 설명할 수 있는 자료조차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불국사 석축 주변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독자들에게 확실한 정보만으로 제공하기 위한 저자의 선택적 결단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측량기사 요네다 미요지의 기록을 토대로 유물 분석을 통해 실측도를 체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후에 추가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것인지,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유일해서 인지는 몰라도 일국의 유물을 타국의 기술자가 분석한 자료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인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반성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석굴암 또한 국가의 힘이 부족할 때 어떻게 유물이 관리되고 몰이해에 기반한 복원으로 그 가치가 훼손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또한 그런 배경적인 정보와 지식은 일체 배제하고, 석굴암의 탄생 배경과 위치와 구조, 과학, 기술, 미학적 가치 등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도 요네마 미요지의 석굴암 의장 계획은 당시 석굴암을 분석하는 유일한 객관적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자국민조차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던 석굴암의 가치를 이국의 기술자로 인해 그나마 사료를 통해 유물을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시리즈가 역사가 아닌 미술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사료를 기초자료로 삼게 된 배경이나 과정 정도는 소개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왕릉

이 장에서는 통일신라 왕릉의 구조, 왕릉의 십이지상과 호신석, 문무대왕의 대왕암을 다루고 있다. 통일신라 왕릉의 구조를 소개한 사진 도판을 보면, 네 개의 무덤이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분 이외에 장식이 없고, 일정한 간격으로 자연석을 두르고 낮은 석축을 쌓고 반듯한 호석을 비스듬히 세운 것도 있다. 호석을 세우고 십이지를 새기거나 봉분 앞에 문인석, 무인석, 돌사자를 배치한 무덤도 보인다. 이런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무덤을 보면, 저자의 주장대로 왕릉이 ‘단순한 형식’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화려한 형식’으로 변해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왕릉의 십이지상을 통일신라 묘제의 독특한 형식이란 측면에서 그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겠다. 왕릉 주변에 배치한 호신석 또한 비록 당나라 능묘 형식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 조각 솜씨를 보면, 독자적인 자생적인 관점에서 독창적인 미를 구현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성덕왕릉은 다양한 묘제 건축의 속성을 모두 갖춘 최초의 왕릉이라는 저자의 관점에서 시선을 끄는 왕릉으로 볼 수 있다. 문무대왕암은 그 속성상 바닷속에 위치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 한계로 인해 사진 도판, 고문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유물사적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비석 조각

저자는 ‘통일신라의 능묘 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으로 <태종무열왕릉비>의 거북받침돌과 용머리지붕돌을 꼽는다. 사진 도판을 보면 여러 장의 거북받침돌이 보인다. 사진 속 받침돌의 거북을 묘사하는 저자의 설명은 마치 현장에서 살아있는 거북이의 움직임을 보듯 생동감이 넘친다. 각기 다른 형태의 거북받침돌은 그 자체로서 독자성과 균형미를 보여준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도 있지만 유물 속성상 분류를 하다 보면 그것이 마치 각개전투를 벌이는 병사처럼 따로 논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도 있다. 이번 장에서 다루는 통일신라 시대의 건축과 왕릉 또한 개괄적인 설명도 물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개별 유물에 집중하여 그 미학적 가치에 대해 파고드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과거의 유물이 한정된 것도 있을 테고, 비교 대상이 많지 않다는 점도 그 이유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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