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에 신경쓰면서 살진 않았다. 그렇다고 유행에 역행하면서 살지도 않았다. 알게 모르게 유행을 접하면서 살았다는게 맞을것 같다. 스노우진이 유행할 때 나도 스노우진을 입었었고, 나이키, 아디다스 운동화가 대세일때는 나도 나이스, 아다디스 운동화를 신었다. 정품을 사기에는 집안 사정은 그닥 여유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오신 짝퉁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내 운동화를 보며 "오~ 아디다..." 하며 자세히 들여다 보던 친구놈이 "어.. 이거 이상한데..." 하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브랜드 로고며 영어 철자도 똑같아서 몰라볼줄 알았는데.. 뭔가 엉성한 그 느낌을, 그리고 그런 모양의 운동화는 그 브랜드에서 나오는 형태가 아님을 금방 알아볼줄은 몰랐다. 부끄러웠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 운동화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개월을 부끄럽게 다녔던것 같다. 몇몇 놈들이 아예 대놓고 아다디스, 프로스포츠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기에 그나마 견뎌냈었던 것 같다.
사회에 나와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는 그닥 유행과 관련된 기억이 없다. 유행을 따라했던 그렇지 않던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현대판 노예 생활에 물들어 이십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회사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때쯤 찾아간 서점에서 퇴사가 유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퇴사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돌아와 인터넷을 열고 몇권의 책을 주문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점은 탐색용이다. 무작정 퇴사한 얘기, 꼼꼼히 준비한 퇴사, 원하지 않은 퇴사등 각각의 경험은 달랐지만 책으로 만난 얘기들이라 그런지 퇴사이후 그들은 다들 책쓰고 잘 살고 있었다.
이 유행 한번 올라타봐?
많은 직장인들이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꿈꾼다. 그렇게 열망하던 입사를 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퇴사가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 잡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직장이란, 회사란 그런 곳이다. 나가면 들어가고 싶고 들어가면 나가고 싶은. 사실 회사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이미 지난해 명퇴를 가장한 인원정리가 한차례 있었다. 내발로 나가느냐, 떠밀려 나가느냐 시간 문제였다. 그 사이 조직 변경 발표가 나고 우리팀은 해체되어 팀원들은 여러 부서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 또한 새로운 부서로 이동되었다. 업무가 어렵거나 새부서원들이 맘에 들지 않거나 하지는 않았다. 직접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는 일이었고, 부서원 모두 친분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가는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부서 이동을 계기로 퇴사에의 욕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와 내 온몸과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필요한 건 나의 결단만이 아니라 아내의 승인 또한 필요했다. 나의 결심도 쉽지 않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아내의 허락을 얻는 과정은 내 결정으로 하여금 아내까지 힘들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어 더 힘들고 미안한 일이다. 어린시절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힘든 시간을 보낸 아내에겐 퇴사와 사업이란 '볼드모트' 같은 금기어였다.
결혼 초기부터 회사생활의 유한함을 얘기했었다. 퇴사, 사업 그런 얘기에 아내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평생 회사를 다닐수 없다는 점에선 동의했다. 늦은 나이의 결혼과 출산으로 아들놈이 제대로 밥벌이 할때까지 생계를 유지하려면 난 70세넘어까지 벌어야 한다. 내 회사가 아닌 이상 그때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월급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지금보다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결국 평생할 수 있는 나만의 일, 내 사업, 내 장사꺼리가 필요한 것은 분명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하라고들 한다. 아내도 똑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내가 딴짓하도록 내버려두는 곳이 아니다. 몸이든 정신이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갈때쯤이면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게 한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게으른 인간이다. 바쁜 직장생활에서도 악착같이 공부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퇴사를 맞이하는 대단한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다. 40이 넘어서면서 항상 퇴사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무엇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었다. 이미 밝혔지만 난 중도포기의 전형적인 모델이지 않은가.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퇴사얘기를 털어놓았다. 아내는 퇴사하면 무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했지만, 퇴사만 하고 싶었지 그다음의 계획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그냥 쉬고 싶다. 일단은 쉬면서 생각해 보겠다. 나의 궁색한 답이었다. 며칠의 숙고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 아내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퇴직금이 다 떨어지기 전에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로, 그렇지 않으면 다시 직장을 알아보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나는 이십여년의 직장 생활을 일단락 짓고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퇴사라는 물결에 동참하게 되었다.
퇴사는 변화를 위한 수단일뿐
'무작정 퇴사하라'
'일단 퇴사하고 여가를 즐겨라. 여유있는 삶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일하지 않아도 된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벌 수 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이다'
이와는 반대의견도 있다.
'회사가 전쟁터면 회사 밖은 지옥이다'
'입사를 위해서는 그렇게 준비하면서 왜 퇴사는 준비하지 않는가?'
'준비 없는 퇴사는 총없이 전장에 나가는 것이다'
'회사 다니면서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준비하지 못한다'
퇴사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소재를 다루는 많은 책들은 이렇게 둘로 나뉘어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에겐 무계획의, 당장의 퇴사가 필요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꼼꼼한 준비로 실패없는 퇴사가 적당한 방법이다. 일견 철저한 준비로 시작하는 퇴사가 누가봐도 나은 방법일 것 같지만, 준비되면 퇴사하겠다는 기한이 정해지지않은 느슨한 계획은 실현되기 쉽지않다. 일단 퇴사하고 보자는 위험부담이 있는 반면 배수의 진을 치고 단기간에 집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퇴사라는 변화를 맞이하는 방식이 다를 뿐, 어느것도 정답이라 할 수는 없다. 나는 퇴사 예찬론자도 비판론자도 아니다. 다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의 모습이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변화를 꾀해야 할 것이다. 퇴사는 그 변화를 일으키는 모멘텀중 하나일뿐이다. 따라서 어떻게 퇴사하느냐 보다는 퇴사를 통해 어떻게 변화할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중도포기자들에겐 변화에의 의지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변화를 끝까지 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