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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Jun 19. 2024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한 자들의 말로


그때 당시 나는 나와 지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어. 그래서 그랬어. 이것 봐. 지금의 나는 정말로 괜찮지?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나는 정말로 타인과 잘 어울리고 싶었지만 내 정신질환 탓에 타인을 배척하게 된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 전부에게 해명하고 싶었다. 나 정말 너희와 어울리고 싶어했어. 너희가 얼마나 멋져보였는지 아니? 함께 어울리고 싶었어. 그때 네가 했던 제안 정말로 수락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쩌다보니 말이야... 

그래서 정말로 나는 인스타에서 과거의 옛 인연들에게 팔로우를 하고, 만나자고 약속을 잡고, 불쑥 생일축하를 건네기도 했다. 아주 오래 하고 싶던 것들이었다. 

생각보다 애들은 나를 반갑게 받아주었다. 나를 아예 무시하며 받아주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나를 받아주고 환영해주었다. 네가 이렇게 해줄 줄 몰랐어.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고 그들에게 환대받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다시 정상성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고, 나는 이제 괴짜도 이상한 존재도 늘 배척받던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고, 기이할정도로 조용하고 고요했던 그 시절의 내가 미친 것처럼 보였는지, 아니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내 주위에 있던 인간들의 끔찍한 압박들에 대해서 폭로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들은, 내가 무서워하던 애들은 사실 그렇게 애들과 친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런 척을 할 뿐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이상하고 괴짜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열심히 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애였다. 

그리고 나와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벽이 느껴져서 잘 다가오지 못했다. 그런 말들을 들었다. 

나는 내가 괴로워했던 그 무수한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고민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 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갈등에 대해서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느끼는 무력함까지도. 나는 지나치게 솔직하지 않았고 그렇게 숨기며 말하고 행동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두려워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파탄난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고 내 끔찍한 과거, 내가 이상한 여자 취급 받으며 후배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던 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 애들 태반은 내가 예쁘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반가워했다. 예쁘장하고 적당히 공부 잘했던 애가 연락을 해서 좋아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를 정말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회의감이 든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했던 과거의 것들을 참 많이 후회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내가 끼지 못한 모임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내가 모르던 모임이 있었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 빼고서는 무리 상관 없이 서울에 대학을 온 동창들은 전부 주기적으로 모여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뒤늦게 애들과 연락하며 지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결코 그 모임에 초대하지 않았다.

그게 너무 큰 상실감이 들었다. 내가 뭘 하는 거지? 라는 생각도. 

나는 내가 소속되지 못한 그 모든 모임과 우정에 질투를 느꼈다. 

상실감을 느꼈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동경하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우정, 같이 게임을 하는 사이. 같이 놀러가는 사이. 그런 것들에. 그런 것들에 큰 동경을 품었다.

대학 동기가 말해준 일본 겨울 방학 온천 여행의 계획을 듣고 나서는 더더욱이었다. 눈 내리는 삿포로의 어느 온천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는다.

단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책만 읽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어느 곳도 들리지 않고, 단지 그 온천에서 지내면서.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구고, 나와서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를 이야기한다. 단지 그 여행의 목적은 그것뿐인 것이다...

나는 내가 책을 읽고 영화를 많이 접하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꾸밈에 관심 없고 두서없이 말하거나 목소리가 너무 크거나 해서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인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은 타인이 먼저 나를 보고 거부하기 때문이며 그 은근하고 소극적인 거부를 인지하지 못하고 들이대는 순간 나는 엄청난 민폐가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존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우선 대중적이어야 하고 그럴듯한 외형을 가지고 섣불리 내 지식을 자랑하거나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중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고 게임에 대해 알고 싶어졌고 남자애들과 평범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학교를 멀쩡히 다니고 웃으면서 다니고 동아리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종종 나를 배척했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거절당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관계가 너무 끔찍이도 부럽고 미쳐버리게 갖고 싶었다. 함께 여행을 가는 사이.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사이에 대해서... 

나는 진정한 나를 찾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목적을 품고 학교를 뛰쳐나와버렸다. 해방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열심히 노력한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되는 감각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의 일탈을 부추긴 사람들은 점점 나와 연락이 끊어지고, 나의 일탈을 말린 사람들만이 나와 오래 연락을 이어갔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옳았던 걸까.

모두가 진심이었다. 내 지독한 고뇌에 대해 털어놓을 때는 모두가 내게 몰입했고 모두가 내게 진심어린 조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탈 이후로 내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모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조언을 아꼈다. 나도 사정을 점점 털어놓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가족과의 진정한 관계 회복은 그 중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끔찍하고 숨이 꽉 막힌 채 서로의 목을 조르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생존해가는 것만 같은 꽉 막힌 관계에서 우리는 조금씩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나를 구원해줬다고 한들 그 구원해준 공간이 좁디 좁은 캐비넷 안이라서 나는 숨막히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었고 나는 미쳐갔다. 나는 미쳐가는 내가 싫었고 내가 다시 미쳐가자 언니도 미쳐갔다. 언니는 내가 멀쩡해지길 바랬다.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 펀치기계가 멀쩡히 작동하길 바래서 나를 구원했다. 그런데 나는 계속 툭하면 고장이 났다. 그래서 언니는 내게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내게 화를 내는 언니 때문에 나는 더 미쳐갔었다. 

그 모든 사정을 말하자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나를 동정했다. 지난 1년 남짓한 시간동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밝고 건강하고 좋은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다며 모두들 크게 동정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를 위로해줬다. 

그런 시기도 있었다. 오히려 말을 털어놓자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내 그런 비극을 핑계로 보거나 아주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내가 그런 아픔이 있다는 것은, 내가 그런 상처 때문에 사람을 쉽게 믿고 애정에 약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래, 어느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언이 맞았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모든 관계에 진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집중했다. 내가 괴로워한 모든 점들을 뜯어고치려고 했다. 옷을 거의 잘 입지 못하고 늘 낡은 것을 걸치는 습관이 지긋지긋해져서 쇼핑몰에서 눈에 보이는 동경하던 옷들을 죄다 샀고, 화장품도 다양하게 사보고 머리도 짧게 잘라봤다.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그렇게 사람들이 한다는 유명한 게임들을 미친듯이 해봤다. 공장 알바도 해보고 요리도 해봤다. 베이킹도 해봤다. 내가 동경하던 것들은 죄다 해봤다. 좋아하던 소설을 다시 읽기도 하였고,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2020년 2월 말,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소설을 인터넷에 올린 날이었다. 그날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고 나는 정말로 2024년 6월인 지금도 그때의 다짐이 생생했다. 

연애를 해봤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돌이켜보면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 다시 만나라고 하면 이런 저런 조건을 따져서 거절하겠지.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정말로 많이 좋아했다. 낭만이 남아있던 나는 그사람과 만난 날들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동정심도 많아서, 데이트 중에 길가에 앉은 노인분을 보면서 걱정하다가, 저분 치매 노인 같으시다고, 길을 잃은 것 같다면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을 걸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추억이 되었다. 

헤어지던 날. 사실 나는 그 쯤에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레즈비언인걸까. 왜 그 남자와 입을 맞출 때 전혀 설레지 않고. 계속해서 '이게 여자였다면 더 설렐까?' 같은 고민을 했을까. 

그래서 헤어짐을 통보받았을 때. 죄책감이 들었다. 그 즈음 나는 점점 더 옷을 멋드러지게 입게 되었고, 점점 더 자부심 어리게 되었다. 그렇게 물 오르듯 꽃 피는 날 두고 헤어지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널 감당할 수 없어."그게 논점이었다. 내가 상처받을 게 걱정된다는 둥 이야기 했지만 그게 논점이었다. 날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나와 통화하는 시간이 아까웠고 그를 서러워하는 나를 달래는 일에도 점점 더 지쳤고 매번 싸우고 입맛이 없어지는 그 과정, 자신이 먼저 고민하다가 사과를 하는 그 긴 과정이 고된 것이었다. 

뒤늦게 후회했다. 진도를 빨리 뺐어야 했다, 그딴 생각을 하면서. 멍청하게도. 

그런 문제가 아니었고 그런 문제로 헤어질 남자라면 최악의 남자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헤어지고 모른 척 연락을 했다면 차라리 다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런 요령이 없는 여자였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고 그게 끝이었다.

헤어지고 나서 2개월이 지나서야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진즉 그만둬야 했었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자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 없다는 게 낯설었다.

그래서 일어나서는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있는 건물 마지막 층에는 공차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생각하다가, 문득. 다른 지역을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 없었다. 그래서 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터미널이 아래였다. 그날 밤 곧장 출발을 하려다가 차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 차를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이소에서 산 공책과 펜 하나를 덜렁 들고 눈을 잠시 붙였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새벽 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갔다. 

서해안을 처음 가봤고 나는 압도적인 그 푸른 바다에 놀라 멈춰섰다. 그러다가 이내 뛰어갔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루종일 홀로 놀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외로워질 때면 지인들과 통화를 했다. 그때는 연락을 하고 지내던 내 다정한 고향 친구는 몇시간이고 나와 통화를 해주었다.

나의 실없는 이야기에도 그 애는 정말로 즐거워해주고 감탄해주었다. 그 애는 나의 감상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 애는 내 글을 읽는 것도 좋아했고, 내가 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느끼는 그 특유의 설렘도 좋아했다. 그 애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궁금하기만 하던 간장 게장도 그곳에서 처음 먹었다. 어릴 적부터 티비로 봐오기만 하던 그 맛있다는 간장게장은 사실 정말 밥도둑이라고 칭할 정도로 맛깔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었지만, 내가 간장게장을 먹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혼자 왔었기에 조개구이는 비싸서 먹어보지 못했다. 그게 뭇내 아쉽다. 내내 바다만 바라봤다. 걷고, 바다를 보고. 걷고. 바다를 보고. 

싸게 예약한 숙소는 보일러가 없어서 정말 추웠고, 침대는 이상하게도 피부가 간지러워서 깊게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내내 바다를 다니느라 습습하게 젖은 내 머리와, 모래 알갱이가 여즉 남아 있는 것만 같은 발바닥. 늘러붙고 퉁퉁 불어서 더는 못 쓸 법한 슬리퍼가 남아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집으로 가는 길, 슬리퍼는 영 못쓰게 되어 다이소에서 하나 새로 사고, 20살에 향수를 사겠다며 둘러보다가 망설이다가 사지 않았던 향을 샀다. 돌아와서는 내내 망설이던 숏컷을 했다. 머리를 숭덩 잘랐고, 어설프게 잘린 머리를 집에 와서 다듬었다. 미용사는 한번도 숏컷을 잘라본 적 없었고 머리는 엉망이었다. 

당시 휴학을 해놓고, 학교를 뛰쳐나와 나를 찾겠어! 라고 선언해두고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봉사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그렇게 바다를 다녀온 뒤 부회장 언니와 만나 회의록을 작성하러 갔다. 

그리고 나를 보는 그 언니의 표정을 보며, 아. 

나는 정상성의 세계에서 퇴출 된 거구나, 내가 저지른 짓이구나. 싶었다. 

그 언니는 미묘하게 서먹해져 있었고 그 뒤로 우리는 이상했다. 나는 널찍한 스터디 카페에 앉아 카페처럼 자유로히 떠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마구잡이로 떠들었고.여름에 썼던 소설이 좋아하는 사람들 덕분에 팬북으로 만들어 판매한다는 사실도 신나서 떠들어댔다. 그 언니는 나에게 호응을 해줬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좋은 카페에 가서 예쁜 디저트를 먹자던 그 약속은 이제 없던 것이 되겠구나.

그 즈음 공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목표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미술 학원은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걸 감히 욕심낼 용기가 없었다. 너무 진심이 되면 괴로울 것 같았고, 그렇기에 아예 생각치도 않았던, 내 영역이 아니라고 정의내렸던 예체능에 눈을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을 쓰면서 내내 그림에 대해 갈망이 있었다. 갈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나는 그림을 한때 잘 그리다가 포기해버린 내가 너무 한심해보였었다. 수의사라는 꿈도, 그림이라는 취미도. 한 사람에 의해서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과거의 인연이 정말 악독하게 나를 비난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그 꿈과 취미를 그만둘 것을 종용했고, 내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가장 가까이에서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것들을 포기해버렸다. 정확히는, 그 꿈을 수행할 수록 할 때마다 그 애의 목소리와 표정, 비난이 들려와서 도무지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정말로 못해낼 것을 간절히 믿고 있었고, 그 애의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그 애를 좋아하던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점점 더 커져갔고, 어느새 내가 그리는 그림은 죄다 일그러져 있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일그러져서, 내가 유치원일때보다도 못 그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미술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미술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공장을 다녔다. 그 생활은 두달간 이어졌다. 잠을 4시간만 자고 공부하고 일하고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건 행복했다. 

하지만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어느날 연락을 받았다. 셋째인 작은 오빠에게서였다. 차단을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는 경고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전했다. 엄마에게 연락을 하란 말이었다. 

그 당시 나는 가족들과 완전히 연을 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다음 날에, 엄마가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니 네 알아서 먹고 살아라, 라는 말을 한 일이 가장 큰 계기였다. 

더 정확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엄마는 돌연 오빠에게 내가 사는 집 주소를 알려준 것으로 모라자서, 언니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찾아갈 거라고 했다.

내가 연락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걱정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처벌의 의미였다. 엄마는 멋대로 연락을 끊고 제멋대로 사는 내게 처벌을 내리고 싶어했다.

그리고 엄마는 언니가 내게 폭력적이고 내가 언니를 두려워하고 공포에 떤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 4시간을 자는데 그 4시간동안 내내 악몽을 꾸는 날들이 이어졌다. 공장에서 텃세 때문에 왕따를 당해도, 심한 면박을 받아도, 생리통에도 쉬지 못하고 일한 뒤에 식은땀을 흘리며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려도. 그 다음에 독서실에 바로 올라가 공부를 하다가 울음이 터져도 그래도 계속해나가는 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나날들이었는데. 그렇게 고생을 해도 계속 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점점 더 자부심에 부풀어오르던 나날들이었는데. 그 나날들은 공포심에 추락하고 말았다. 나는 내내 공포에 떨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바로 토해버릴 것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결국 나는 학원도 그만두고 공장도 그만뒀다. 공장 사람들은 내가 수능을 치러 가는 줄 알고 응원해주었다. 따뜻한 말이 담긴 쪽지를 봤다. 사무직 분들은 나를 응원하며 멋있다고 해주었고, 그들이 착취하는 생산직 분들은 자신의 자리가 뺏길 것이 두렵고 나쁘지 않은 대학에 가놓고서도 더 좋은 곳에 가겠다고 아득바득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듯한 내가 독하고 못되 보여서 아주 미워했었다. 누구도 내 진심을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느라고 나중에는 성격에도 맞지 않게 늘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었다. 미술학원에서는 일을 하느라 고된 나를 보고 견제하는 남자가 내게 "에코백으론 미대 못 다녀요." 같은 이상한 말을 해댔다. 나는 공대생이라 그 에코백에 노트북도 충전기도 교재도 다 넣고 다닌다고 맞받아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 학원을 그만두면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지금 뭣 하는 거지? 그래, 나는 달아나고 있다. 또다시. 달아나고 있었다. 급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은 모든 것들을 엉망진창으로 둔 채로. 달아나고 있었다. 

문득, 처음 휴학을 하고 가족들과 거리를 뒀을 때. 언니에게 받았던 장문의 카톡이 생각이 났다. 그 기다란 말에서 그런 말이 눈에 띄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 연우야." 나는 그 말을 보고 공포에 떨었다. 내가 도망친 대상이 바로 그 언니였기 때문이고, 차단을 했는데도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서 보낸 카톡이 저런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나를 계도하고 고쳐야 할 대상으로 봤고, 그렇기에 왜 자신의 말이 맞고 네가 틀린지,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인지 설명하는 궤변들이 주르륵 이어져 있었다. 

그 말을 증명하려는 듯, 그들이 나를 찾아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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