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성 Jan 23. 2019

글이 나를 쓰는 이유

책프협 2019년 1월 공통 주제 - 내가 글을 쓰는 이유

 1월 공통 주제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라는 주제를 받았다. 나는 항상 무얼 하던지 남들과는 다른 것이 없을까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 과제 역시 주제에서 느껴지는 뻔한 제목과 글 말고 다른 재미난 제목이나 콘텐츠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만 해 보았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다. 마감 3일 전이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 쓰지...' 이런 걱정이 들긴 했지만 남들과 똑같은 주제는 하기 싫다는 미련이 더 강하게 그 걱정을 밀쳐 냈다.


 그래서 진짜로 '나는 글을 언제 썼나...' 생각해 봤다. 지금껏 썼던 글 중에 스스로 만족하는 글은 대부분 마감이 닥쳐왔을 때 탄생했다. '글은 마감이 쓴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런 글들은 항상 글쓰기 전에 그렸던 구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이어졌다. 글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글이 좋았다. 잘 빠졌다. 잘빠진 글에서는 항상 내가 보였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클 때는 글을 꾸며내는 데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마감이 그 마음을 덮고 나면, 잘 쓰려는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무작정 손을 키보드에 올려 두드린다. 떠오른 대로 쓰고, 손이 가는 대로 쓴다. 쓰다 보면 글이 알아서 가닥을 잡는다. 그 가닥은 항상 나를 향했다. 그래서 미처 꾸며 내지 못한 내가 그 안에 담겨 버린다. 그래서 이번 글은 더더욱 마감이 써야 했나보다.(응?)


그래서 글에게 질문해 보려고 한다. 너는 나를 쓰는 이유가 뭐니?


생각해보니

 글이 나에게 글을 쓰라고 똑똑 두드릴 때가 종종 있었다. 회사 생활하면서 일에 치여서 허덕일 때, 어느 시점이 되면 당장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서 뭐라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복받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당장 뛰쳐나가지는 못했다. 겨우 새벽에 시간을 내어 펜을 들었다. 그러면 그 펜이 말한다. 아까 뛰쳐나왔어야 했다고.

 대학 시절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활동들로 사방팔방 바쁘게 뛰어다녔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숨이 막힌다고 했다.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억지로 잠재우고 싶어 그랬던 것 같다. 그때도 종종 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글을 쓰고 나서 한 두 가지씩은 벌려 놓았던 일들을 접었다. 함께 했던 친구들은 나에게 실망했다.

 수능 준비할 때도 그랬다. 당시 QT(Quiet Time, 짧은 구절의 성경을 읽고 떠오른 느낌이나 깨달음을 적고 기도하는 시간. 기독교 신앙생활의 한 형태)를 꾸준히 하고 있어서 매일 내 생각을 기록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는 짧은 메모가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글이 나를 토해 냈다. 정해진 공부 시간을 미루고서 라도 그것을 써야 했다. 당시 모든 QT의 결론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렇게 토해내듯 글을 쓴 날은 그 이후로 반나절은 그 시원함에 공부를 쉬엄쉬엄 했다.


이기적

 너는 나를 쓰는 이유가 뭐니? 질문했을 때 머릿속을 스쳐간 단어 하나는 '이기적'이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나를 설명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이 이기적이냐'라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글이 나에게 말한다 나는 이기적이라고.


 도덕경에 좋아하는 구절 중 이런 부분이 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너무 감명을 받았다. 에버노트에 적어 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았다. 내가 쓴 여러 글의 인사이트(insight)가 되었고, 인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쓴 글로 상도 받고 장학금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차를 갖고 싶고 집도 갖고 싶다. 이왕 사는 인생 쉽게 가고 싶다. 키도 남들보다 컸으면 좋겠다. 높은 자리에서 남을 부리고 싶다. 좋은 소리를 만들기보다는 내가 돋보이도록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 남들보다 앞에 서고 싶다.

 도덕경의 구절에 감명을 받는 것과, 살면서 내가 실제로 원해서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내 하루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행동의 동기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얼마 전 트렌드 코리아 2019의 들어가는 말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삶이 소비로 치환되는 현대사회에서...

이 짧은 수식어를 보고 한동안 가슴 시리고 멍하게 있었다. 과연 그렇구나 싶어서. 그래서 나는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글에게 반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글에게 나를 쓰는 이유를 물었을 때, 내가 이기적이라고 대답한 것은 왜일까? 왜 이기적이기 때문에 글을 써야 할까?


자기소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면 한국 사화에서는 보통 '나는 ㅇㅇㅇ 회사/학교에 다니고, 어디에 살고,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며...'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다큐에서는 한국 사람들과 외국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시켜 보고 그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한다. '표현하는 내용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변 환경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소개하지만, 외국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요즘 재미있게 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 등을 하며 자신을 소개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가 얼마나 자아 정체성이 부족하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고저쩌고...' 그리고 이런 뉘앙스는 다양한 심리학 책이나 자기 계발서에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부터는 자기소개할 때 사는 지역이나 가족, 회사 같은 것을 소개하지 않으면서 자기소개하는 것이 힙하다(hip-하다)고 생각해서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면 이런 것부터 떠오른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이야기하면서 나를 소개하려고 했더니 영 달갑지 않다. '결국 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다른 대상을 빌어 쓰는 것은 똑같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힙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날 떠오른 대로 이야기한다.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이윤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만 말하고 마친다. 나 나름대로 이것을 칠린(chillin) 하다고 정의하고 산다. 물론 상대방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괜찮아

 대학 교양 수업에서 짧게 들었던 라캉의 이론 중에 '거울 단계'이라는 것이 있다. 어린아이가 자아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라는 내용이다. 자아를 인식하지 못한 아이는 거울을 보여주면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는 어떤 녀석을 보면서 까르르 웃으면서 신기해한다. 아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아이는 더 이상 거울을 보며 웃지 않고, 인생에 큰 즐거움 하나를 잃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 자아 인식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애초에 다른 대상(사물, 타자)을 통해서 라는 것이다.


글에게 물었다. 너는 나를 쓰는 이유가 뭐니?


 질문만 던지고 이유를 모른 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따라 글을 썼다. 쓰다 보니 이제 알겠다.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과 기준에 따라 산다. 또는 내가 정한 어떤 기준에 따라서 산다. 이 기준 역시도 사회로부터 그것이 '좋다.' 또는 '바람직하다.'라고 여겨지는 것의 영향을 받았다. 거울을 보고 '이 못생긴 아이가 나구나'라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살 수밖에.

 이런 내가 잃었던 소중한 것을 되찾게 해 주려고 글이 나를 불러 냈다. 독서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쓰면서 라도, 대학 친구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면서 까지도, 회사에서 억지로 나를 끌어내서 라도, 나를 구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괜찮아.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내 마음이 정해놓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나로 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1월미션] '1일 1글쓰기'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