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를 떠난 기차에서 다음날 내린 곳은 수도 워싱턴.
출발 전에 기독교 계통 단체에서 운영하는 숙소를 예약했었다.
숙소는 가로수 길을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서 뜰이 넓은 안정된 주택가에 있었는데,
커다란 가정집을 최소한만 개조한 보통의 주택이었다.
즉, 거실과 부엌이 있고 가정집 가구가 있고.
손님이 고를 수 있는 큰방, 작은방이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혼자 쓰는 내 방 인테리어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풍이어서
꽃무늬 벽지와 커튼, 소녀 취향의 침대, 작은 테이블이 있는 기능적이고 소박한 방이었다.
집은 컸지만 방들 또한 큼직해서 손님은 적었다.
집 내부에서 오갈 때 다른 손님과 마주친 기억은 없다.
낮에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점심을 먹고,
늦은 오후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저녁 먹을 것을 사들고 왔다.
방에 돌아오면 샤워하고 일단 좀 주무셔야지.
한잠 자고 나면 피로가 풀려 가방 정리도 하고,
오늘 다닌 곳, 내일 다닐 곳 체크하면서 시내에서 사들고 온 저녁을 먹었다.
워싱턴 시내는 길이 넓고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깨끗한 도시였다.
4월쯤이어서 분홍빛 벚꽃이 만발했고 녹지가 많아 푸릇푸릇한 봄기운으로 도시는 활기를 띄었다.
길도, 건물 간격도, 시내구역도 아주 넓어서 걸어 다니기에는 참 곤란한 도시였는데.
걸으면서 구경하는 풍경이 좋고 날이 상쾌해서,
에고 에고 힘들어, 신음하면서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수도답게 석조의 장중한 관공서가 줄지어 늠름하게 서있었고.
건물들은 또 얼마나 큰지 고작 건물 하나 지나고 나면 주저앉을 곳을 찾아야 했다.
워싱턴은 박물관의 도시였다.
대형 미술관, 박물관이 몇 개가 있는지.
내게는 자연사 박물관이 흥미로웠는데.
아시겠지만 커다란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어지간한 도시 하나 걸은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중에는 기력이 딸려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몽롱한 신체 상태가 된다.
숙박비에는 아침 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움직이는 시간대가 비슷한 숙박객들이 거실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커다란 원형 식탁에 접시를 들고 모여 앉게 되었다.
누구도 억지로 말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서로 빵 바구니를 돌리고,
커피 주전자를 나누면서 식탁에는 나지막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일단 자기소개.
유럽에서 온 나이 든 부부,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가족,
갭이어로 여행 중이라는 사춘기를 막 벗어난 독일 여학생이 기억난다.
나처럼 영어 울렁증으로 듣는 편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 남학생도 있었고.
나는 말하기만이 아니라 듣기도 잘 안 되는 터여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신의 억양으로 조용조용 영어를 말했던 화사했던 어느 봄날.
워싱턴의 숙소 거실에서 이루어진 아침 식사 자리의 대화 내용을 모두 떠올릴 수는 없지만.
여행자의 너그러움과
타지에서의 흥분으로 살짝 들뜬 사람들이,
배려와 호의로 서로에게 친절했던
길지 않은 아침 식사 자리는 참 따스하게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