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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Nov 09. 2024

옷차림의 세월

끄적끄적

지겹도록 긴 여름이었다가 10월 들어서야 가을이 오나 싶더니

미처 여름옷을 정리하기 전에 가을옷을 꺼냈다.

여전히 가을옷을 입는 11월,

이제 초겨울 옷을 꺼낸다.

아직은 푹 하지만 언제 추위가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옷을 꺼내고 집어넣으면서 나의 옷차림을 돌아본다.

올해도 꺼내놓았지만 입지 않은 옷들이 대부분이고.

그럼에도 버리지 않고 다시 옷장으로 들어간다.

내년이라고 입을까?



젊었을 때도 모양보다는 편한 옷을 찾았다.

격동의 시기인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남녀 공학 대학 생활을 보낸 사람이라,

대학에 들어갈 때는 굽 높은 구두도 사고,

디자이너의 배기 바지 같은 패셔니스타 포부가 있었는데.

여학생 수가 적은 데다가 대개들 수수한 차림이라서,

남들 눈에 띄기 싫어하는 나는

등교복으로 청바지에 상의는 주로 셔츠, 카디건을 입게 되었다.

나름 색상도 짙고 옅고,

스타일도 조금씩 다른 청바지를 입긴 했지만 말입니다.

한 학기에 한 번쯤 스커트 차림으로 학교에 가면 다들,

옹, 무슨 일이래? 하며 아는 체를 하곤 했었지.


편한 옷이 최우선이었지만 나만의 스타일에 관심은 있었는데.

2,30대는 옷차림이 중구난방이었던 것 같다.

캐주얼하게 입는가, 하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정장을 입기도 했고.

누구 결혼식이라면 값비싼 옷을 쫙 빼입고 나타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민폐인 줄 몰랐다.

차려입을 기회가 오니까 입었을 뿐.

키가 큰 나는 기성복이 안 맞아서 양장점에서 옷을 비싸게 맞춰 입었는데.

나중에 수입자유화가 되면서 살 옷이 갑자기 많아지니 어찌나 좋던지.

30대에 옷 값을 제일 많이 쓴 것 같다.

그 시기는 허영심이 치솟을 때라서 해외여행 가면 옷과 신발을 한 짐 들고 오기도 했고,

고가의 브랜드에 혹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점차 내 스타일이 자리를 잡아서 40대에 들어섰을 때는 옷이 몸에 쫙쫙 붙는다는 느낌이 들었네.

어떤 옷을 보기만 해도 내게 어울릴지 판단이 되고,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포기하고 말이다.

위, 아래, 신발, 가방까지 눈에 딱 그려지면서 옷 고르고 입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스타일이 유지는 되고 있는데. 하지만 차려입고 나갈 일이 거의 없고.

더구나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에 질끈 묶은 머리로 동네에서나 왔다 갔다 하니,

영 초라한 노인일 뿐이지.


청바지는 30대에 들어서부터 거의 입지 않았다. 

면바지나 면 스커트에 니트를 입지.

또는 다리에 딱 붙는 승마복 스타일의 바지도 좋아한다.

위에는 긴 니트를 입고요.

원피스도 좋아는 하는데 요새는 맘에 드는 스타일이 없어서 못 산다.

젊어서 입던 원피스는 더는 안 어울리고.

모자는 예나 지금이나 좋아해서 종종 쓰지만,

예전에는 모양내느라 썼다면 지금은 완전 실용의 목적.

여름에는 해를 가리고 겨울에는 따뜻하기를 원할 뿐이다.

옷 색깔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는데 분홍색은 안 어울린다.

차라리 핫핑크는 괜찮은데 연분홍은 정말 안 어울려서 잠옷으로도 안 입는다.

짧은 반바지나 노출 있는 옷도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가려야 마음이 편하다.

레이스 옷도 예나 지금이나 안 입는다.

한때는 속옷이나 잠옷으로 하늘하늘한 레이스를 입기도 했지만,

어우, 이제는 세탁기에 팍팍 돌리는 순면이 좋아요.


더는 각진 정장도 입지 않는다.

차려입을 자리라도 상의는 보통 니트,

하의는 무릎을 살짝 덮는, 또는 종아리 중간쯤 길이의 일자 치마가 대부분이다.

날씨에 따라 겉에 코트를 입거나.

30대 이후 종종 망토나 큰 숄을 걸친다.

펄럭이는 폭넓은 치마는 맨투맨이나 후디에 맞춰 평상복으로 입는다.

신발은 굽 낮은 구두나 운동화를 주로 신는다.

끈 묶는 캔버스화에 여전히 눈길이 가서 색색으로 갖고는 있는데.

동네 왔다 갔다 할 때는 발이 쑥 들어가는 슬립온만 신지요.



예전에 신던 굽 높은 구두 몇 켤레를 아직도 들고 있다.

신을 일은 없는데 키에 비해 발이 작아서 주변에 맞는 사람이 없네.

오래되니 굽이 삭는다.

어쩔까?

세월이 정말 빠르다.

몇 번 입지도 않은 옷이나 신발은 낡지 않고 여전한데 옷 주인은 꾸준히 늙어가는구나.


가끔은 모양내고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집 나서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

사람 만나기는 더 귀찮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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