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2- 욕심
옛날 옛날 어느 은행에 섭외의 여왕이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손님들은 여왕에게 상품을 가입하기 위해 줄을 섰지요.
어느 날은 적금, 또 어느 날은 펀드.
섭외의 여왕은 늘 실적이 좋았습니다.
동네에 소문이 났습니다.
여왕님에게 펀드를 가입하면 대박이 난다고.
줄 서던 도중에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고 이탈자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맛집의 옆집’으로 옵니다.
생각지 못한 손님을 맞이한 옆집은
여왕님에게 귀동냥한 스킬들을 꺼내 보입니다.
그럼 손님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같은 상품인데 잘 되겠지” 하면서.
네. 눈치채셨죠? 그 옆집이 누구인지. 하하
회사 입장에서는 섭외 잘하는 직원과 열심히 대기 인수를 줄이는 직원 둘 다 필요하지만
아무리 잡일을 잘해도 주목받는 것은 늘 섭외의 여왕이지요.
11년간 은행을 다녔습니다.
그동안 한 직원에게 줄 서서 상품 가입하는 것을 본 건 그 시절이 유일합니다.
어찌나 설명을 잘하던지 옆에서 듣고 있는 나도 무조건 가입하고 싶어졌습니다.
질투가 났냐고요? 전혀요. 범접할 수 없는 존재랄까?
오히려 옆에서 들으며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하고 욕심부릴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줄 서다 지친 손님들이 못 이기는 척 앉는 곳.
대단한 맛은 못 내어도 그 명성에 살짝 기댄 채 제 몫을 다하는 맛집의 옆집
1등은 탐내지 않되,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리를 지키는 옆집 주인장이 바로 나였습니다.
섭외 욕심이라는 자극적인 양념이 빠진 채로 운영을 했더니
언젠가 한 번은 책임자에게 엄청 혼난 적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욕심이 없냐고. 실적 욕심 내서 섭외 좀 하라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마치고 남겨서까지 혼을 내셨을까요.
회사에 다니던 내내 나는 세일즈보다는 열심히 ‘딩동’하는 직원이었습니다.
귀찮지만 꼭 필요한 일이 주로 나에게 왔습니다.
오죽하면 ‘상속 전문' ,‘보이스피싱 처리 전문’으로 불렸을까요.
성격은 또 어찌나 급한지 대기 인수가 열 명이 넘어가면 마음이 조급해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불꽃 딩동을 합니다.
자연히 영광은 실적 좋은 이들에게 돌아갑니다.
뭐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저 출근해서 옆 직원들과 커피 한 잔하며 하루를 나누고
어려운 일 처리 도와줘서 고맙다며
어르신들이 들고 오시는 비닐봉지 속 바나나우유가 있어 좋았습니다.
욕심 없는 자가 실적 최우선인 은행에서 살아남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욕심은 안 부리지만 눈치는 보이니
요령껏 첫 지점에서 익힌 섭외 여왕님의 스킬을 풀어냈습니다.
적당히 중위권의 등수만 유지해도 혼날 일은 없으니 괜찮았습니다.
(뒤에서 절 바라보는 책임자분들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11년 동안의 실적압박을 내려놓고 나니 후련했습니다.
그런데 관두고 나서 늦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많아지니 쓸데없는 것들만 눈에 잔뜩 들어오더라고요.
옆라인에 사는 누구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벌써 세 자릿수 곱하기를 한다더라.
같은 어린이집 다니던 누구는 영어가 네이티브 수준이더라 같은 것들이요.
내가 너무 아이 교육에 무관심했나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 저는 애들 공부 열심히 안 시킬 거예요.
- 학교 들어가 봐라. 그 마음 완전 달라질걸?
옆자리 선배 언니들과의 대화가 스쳐 지났습니다. 역시 경험자들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루에 몇 권씩 영어책을 읽히고,
나도 풀기 어려워 보이는 최상위 수학 문제집을 쥐어줬습니다.
은행에서는 대기 인수 열 명에 조급해져 '불꽃 딩동'을 하던 내가,
이제는 세 자릿수는커녕 더하기 빼기도 못하는 아이의 미래에 조바심이 나 '불꽃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고수들 틈에서도 못 피운 욕심에, 우리 딸이 시원하게 불을 지폈습니다.
엄마가 매일 집에 있어 좋아하던 아이들이
이제 엄마가 있어서 힘들어졌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제일 싫어하던 비교와 실적주의가
우리 집에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그림책 교실을 제외한 모든 학원을 끊고 스스로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규칙은 딱 한 가지.
TV나 핸드폰을 보면서 시간 낭비 하지 않기.
집에 오면 낮잠만 퍼질러 자는 아이를 보며 속이 뒤집혔지만 꾹 참았습니다.
잘만큼 잤는지 (심심했는지) 어느 날부터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흠뻑 빠져서 방에 틀어박혀 그것만 읽어댔습니다. (아니, 수학은? 영어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참았습니다.
다 내 욕심이니까요.
물론, 아이 스스로 책을 펼치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참을 집에서 뒹굴거리며 낮잠과 판타지 소설에 취해있던 아이가
어느 날 슬그머니 다가와 말하더군요.
"엄마, 나 그냥 다시 학원 갈래. 너무 심심해."
엄마가 욕심이라는 조미료를 팍 줄였더니,
아이가 스스로 제 인생의 맛을 찾기 위해 요리책을 펼친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해리포터를 다 읽어서일까요?
이유야 어쨌든 아이는 다시 가방을 메고 나갑니다.
나는 여전히 맛집의 옆집입니다.
남들만큼 화려한 간판을 달거나 다양한 메뉴를 가지지는 못해도
내 아이라는 작은 가게가 스스로의 맛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그 거리를 지켜주는 가게.
어제보단 조금 맛이 덜해도, 속도가 좀 느려도 괜찮습니다.
그게 옆집 주인의 유일한 영업 방침이니까요.
얼마 전, 엄마와 김장을 했습니다.
배추에 물을 빼고 양념까지 다 해놓으신 상태라, 나는 그저 치대기만 하면 됐습니다.
엄마는 자꾸 무언가를 주고 싶은가 봅니다.
- 이거 가져가서 먹을래? , 이거 줄까?
- 아니, 괜찮아. 엄마 먹어요.
김치 두통 담아가는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십니다.
"니는 참 욕심이 없어서 좋겠다."